"엄마, 하지 마 엄마가 이렇게 하는 게 나는 어색해서 불편해."
그 말의 의미를 나는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그 순간 정말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딸을 키우면서 내가 얼마나 배 한번 문질려 주지 않았으면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슬프고 마음 아팠습니다.

나는 혼자 가만히 있는 시간이 그냥 멍하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본 속 여자가 머릿속에 가득이었습니다. 날마다 그러했기 때문에, 어린 딸이 배 아프다고 하면 "아가, 이리 와." 하고 안아 주었지만, 대본 속 역할을 생각하듯이 그만큼 온 마음을 다해 대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른이 된 딸은 나를 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고맙고 미안합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아이들을 낳긴 낳았지만 내가 하는 배역을 더 많이생각하느라 아이들에게 전력투구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라고할 수도 없었습니다.
생에 감사합니다. 나는 그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천성적으로 없는 사람입니다. 내 딸 임고은이 언젠가 내 대본 뒤에 써 놓은글이 있습니다.
‘나는 엄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생각해. 나도 엄마 같은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어.‘

그 대본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내 딸은 모든 것이 부족한 이 엄마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현모양처인 줄로만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살림도 못하고, 대본만 받으면 그날부터 대본 속 인물이 되어 버려서 식구들은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남편과 아이들은 내가 배우이니까 당연하다고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배우로서 잘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가족에게 남긴 자잘한 상처들이 흐지부지 묻히지 않도록 가족에게 상처를주면서 배우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배우로서 떳떳하지 못하면정말 면목이 없는 일입니다. 나를 배우로 인정해 주는 가족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가족에게 미안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연기에 집중하면서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신도 나에게 싫증날 것 같았습니다. 날마다 잘못했다고 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하고, 그 말이 사라지기도 전에 또 잘못하고 실수를 저지르는 나를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고개를 저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나를 여태까지 살게 하셨는지,
나는 그것이 의문입니다. 잘못한 것도 많고 실수한 것도 많은데 신은 나를 왜 이렇게 오래 살게 하실까요? 

어른들에게 실망한 오스카는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소아병동의 가장 나이 많은 간호사인 장미 할머니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장미 할머니는 일주일에 두세 번 병원을 찾는 호스피스 자원봉사 간호사입니다. 그녀를 장미할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스카밖에 없습니다. 병동에서 일할 때 핑크빛 감도는 장미색 가운을 입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전직 프로 레슬링 선수라고 소개하는 그녀는 프로 레슬링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어 오스카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 줍니다. 장미 할머니는 오스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생각을 고백하렴.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생각들, 그것들은 너에게 들러붙고 너를 짓눌러 꼼짝 못 하게 한 다음, 새로운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 너를 썩게 만들지. 고백하지 않으면 너는 구닥다리 생각들로 가득 찬 악취 나는 쓰레기장이될 거야"

장미 할머니의 권유에 따라 소년은 하루를 10년이라고 생각하고 살기로 합니다. 

마치는 날까지 나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열흘째 되던 날, 다시 말해 죽기 이틀 전 오스카는 이렇게 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늘 난 백 살이 되었어요. 장미 할머니처럼요. 계속 잠이 쏟아지지만 기분은 좋아요. 난 엄마랑 아빠에게 삶이란 참 희한한 선물이라고 얘기를 해 줬어요.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선물을 과대평가해요. 영원한 삶을 선물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나중엔 과소평가해요. 지긋지긋하다느니 너무 짧다느니 하면서 내동댕이치려고 해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선물받은 게 아니라 잠시 빌린 거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그래요, 삶은 선물이 아니에요. 잠시 빌린 것이죠. 빌린 거니까 잘써야죠.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거예요."

삶은 그냥 살아가는 것밖에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픈 오스카만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게 아닙니다. 몸이 성한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처음 보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너무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며칠을살더라도 얼마만큼 가득 차게 사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삶은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삶과 죽음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이 연극은 말합니다.

"네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 가고 나서 내가 몇날 며칠을 울었는지 아느냐?"라고 말하는 순정파입니다. 
옛날 애인인데도 늘 와서 나를 보호해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고, 여행도 데려갑니다. 
그리고 군불 때는 방에서 가운데에다 가방으로 금을 그어 놓고 둘이서 잡니다. 그때 남자가 말합니다.
"참 세월이란 게 웃기다. 젊었으면 뺨을 맞아도 너를 으스러지게 안았을 텐데, 지금은 졸려서 못 안겠다"
그런 장면들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 방에서 자고 일어나 아침에 해 뜨는 것을 둘이서 바라봅니다. 그때 내가 손을 내밉니다. 남자는 이 여자가 하도 새침데기이니까 가만히 있습니다. 여자가 말합니다.
손 잡아 무안하게 손 잡으라고 내밀었는데, 왜 안 잡아?"
그러니까 손을 잡습니다. 또 내가 친절하게 해 주니까 남자는 너무 좋아서 춤추는 걸음걸이로 담 옆을 걸어갑니다. 내가 안 보는 데서 막 춤을 추면서 갑니다.
대본 속 인물이지만 그런 남자가 곁에 있어서 마음이 따뜻하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 어려움 속에서 서로를 보호해 주는 것이 전부일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들의 삶을 보는 게 흥미롭고 진력나지 않았습니다. 또 다섯 명의 여자가 연결된 신이 많아서 한두 마디 하려고 다 함께 기다리며 촬영할 때가 많았는데, 그동안 조연과 단역들이 주연인 내가 연기하는 동안 이렇게 기다렸겠구나 싶은 생각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PD 저널의 방연주 객원기자라는 분은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보고 리뷰에 노벨문학상을 탄 쉼보르스카의 시를 인용했습니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 중에서).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어떻게 사는가보다 어떻게 죽는가가 중요해지는 순간이 인생에는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희경 작가가 한 말처럼,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젊은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치열함을 살고 있는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
과 함께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희망을 세상에 전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디어 마이 프렌즈」는 많은 배우들이 함께 나옵니다. 그럼에도 노희경 작가는 배우를 살릴 줄 압니다. 나의 경우에 혼자서 거의 3분을 떠들게 했습니다. 
회자는 치매에 걸려서 어릴 때 죽은 아들을 생각합니다. 아들 잃었던 그 순간이 마음속 한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살던 데를 찾아가서 베개를 업고 포대기까지 하고 돌아다닙니다. 아기가 아프니까 혼자서 아기를 업고 돌아다니던 것을 그대로 재연합니다. 
치매 걸린 내가 사라진 것을 알고 친구들이 찾아옵니다. 그때 내가 베개를 업고 친구 정아에게 오열하며 소리칩니다.

"나쁜 년, 네가 여길 어떻게 와? 네가 감히 여기를 어떻게 와? 이 물어뜯어 죽일 년아…………. 내가 너한테 전화했지. 내 아들이 열감기인데 도와달라고, 약 먹었는데 안 낫는다고, 무섭다고 와 달라고 했지. 왜 맨날 너는 그렇게 사는 게 힘들어? 왜 맨날 힘들어서 내가 필요할 때는 없어. 남편한테도 전화 안 되고,
그 밤에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전화했더니 기껏 나보고 ‘나도 힘든데 징징대지 마‘라고 그러고 너 전화 끊었지. 난 너밖에 없었는데……. 니네들은 왜 그렇게 사는 게 힘들어? 맨날 힘들어. 그래서 내가 맘 놓고 기대지도 못하게‥…내, 이년아. 나쁜 년. 넌 친구도 아냐. 내 아들이 내 등에서 죽었어. 내 아들 살려내."

"누가 벽에 요정들을 그려도 된다고 그랬지?"
여자는 말합니다.
"요정이 아니라 새예요."
"새든 요정이든 누가 허락했느냐고?"
"당신이 집을 보기 좋게 만들어 놓으라고 해서요. 내가 보기엔 이것이 좋아 보여서요."
선천적인 장애에다 관절염, 폐기종을 앓고 있던 여자의 건강은 나빠져만 갑니다. 나중에는 허리가 완전히 굽고 발목에 힘이 빠져 제대로 걸을 수도 없습니다. 붓을 쥐어도 손가락이 아프지만 그녀는 매서운 추위 속에서 그림을 그려 나갑니다. 결국 여자는 건강이 악화되어 쓰러집니다. 
병원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내가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하고자책합니다. 그 말에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말합니다.
"나는 사랑받았어요. 나는 충분히 사랑받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 눈을 감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여자가 그린 그림으로 가득한 집에서 쓸쓸하게 물건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여자가 처음 상점에서 발견한 구인 쪽지를 평생 보관했음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캐나다 영화 「내 사랑」(에이슬링 월쉬 감독의 2016년 개봉작, 샐리호킨스 · 에단 호크 주연, 캐나다인들이 사랑하는 여성 화가 모드 루이

「엄마의 바다」 「여」「그대 그리고 나」 「장미와 콩나물」「엄마가 뿔났다」「청담동 살아요」 「디어 마이 프렌즈」 「눈이 부시게」 「우리들의 블루스」등 100여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연극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 「19 그리고 80 셜리 발렌타인」「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 등의 주인공 역을 했으며, 영화로는 「만주」 「마요네즈」 「마더」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있다.
작품을 선택할 때는 비록 현실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더라도 그 사이에서 바늘귀만 한 희망의 빛이 보이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연기를 하는 동안 살아 있음을 느꼈고, 동시에 보는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다. 1966년제2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연기상을 시작으로 MBC 연기대상,
KBS 연기대상, 마닐라 국제영화제, 부일영화상, LA 비평가협회상 등에서 수차례 수상했으며,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대상 4차례, 여자최우수연기상 4차례를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삼십 대 끝자락이던 때, 혜자 님과 산으로 들로 긴 여행을 다녔습니다. 영화 마더」촬영지가 전국에 흩어져 있었던 덕분이었는데, 그만큼 저나 촬영감독, 프로듀서 모두 아름다운 로케이션 찾기에 한껏 욕심을 낸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완성된 영화를 보았을 때, 모두가 단번에 깨닫고 말았습니다. 이 영화 최고의 풍광은 무엇보다도 혜자 님의 얼굴 그 자체라는 것을.
그리고 카메라는 점점 더 혜자 님의 커다란 두 눈을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는것을 그 신비로운 두 눈을 통해 그분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 라는 식의 상투적인 표현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해 가을과 겨울, 그분의 두 눈이 어떻게 시네마스코프의 드넓은 캔버스를 집어삼켜 버리는지 카메라를 통해 생생히 지켜보았습니다. 경이로웠습니다.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이 칭송해 온 혜자 님의 명연기에 대해 제가 굳이 어떤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그 놀라운 섬광 같은 순간들이 필름에 담겨지기도 전에, 이 세상 누구보다 가장 먼저 맨눈으로 목격했다는 것은 저에게 분명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저는 또 한 번의 행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혜자 님의 눈빛에 어울리는 맑고 깊은 이야기를 써낼 수 있기를 꿈꾸면서 말입니다. - 봉준호(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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