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조마조마하던 오빠의 결혼을 잘 치른 후의 안도감과 허탈감, 그리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이 불안한 시국을 의식 안 할수 없는 감질나는 평화로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반평생의 며느리 노릇을 짓누르던 권위주의로부터의 당돌하고도 상쾌한 해방감때문이었을까. 나는 다만 구경꾼에 불과했건만도 그 장면은 언제떠올려도 선명하고도 정겹다.
먼 훗날, 신문 같은 데에 시골 선비집에서 귀중한 자료가 될 만한 고서나 국보적 가치가 있는 문헌이 발견됐단 소식이 나면 엄마는 "그때 우리가 참 무지막지한 짓을 했지." 하면서 계면쩍게 웃곤 했다. 할아버지 책 중에도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었지 않나 하는 후회의 뜻이겠으나 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장서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문헌의 가치도 중요하겠지만 그때 며느리들이 누린 해방감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 P171

올케는 오빠가 하는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한편 오빠가 잊고 지내는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일깨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밥도 안 굶어 보고 쌀 중한 걸 알 수 없는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으로 밥 벌어 본 경험도 없이 어떻게 노동자를 위할 줄 알겠느냐는 소리도 힘 안 들이고 툭툭 잘 했다. 언니의 화법은 특이했다. 옆에서 듣는 사람 속까지 시원하게 해 주면서도 오빠의 자존심을 긁는 신랄함이 없이 다만 구수했다. 오빠가언니를 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어한 것도 아마 이성간의 직감으로그런 소질을 감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때가 마침 오빠에게얼마나 충고와 위안이 필요한 시기였던가도 알 것 같았다. - P214

애국단체는 또 왜 그렇게 많이 생겨났던지, 그들이 내건 구호와성병으로 거리거리의 벽마다 도배를 하다시피 했는데 하나같이공산당의 만행을 규탄하고 적색분자를 남김없이 색출해 이 참에씨를 말려야 한다는 격렬하고도 호전적인 것들이었다. 한번은 그린 벽보 가운데 ‘자유주의 만세‘ 라고만 쓴 초라한 벽보를 보고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한참 심신이 황폐할 때였는데그 보자 무릎이 스스로 꺾일 만큼 힘이 빠졌다. 이런 수모와 단권을 받으면서도 북쪽에서 설사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준대도 바하고 싶지 않은 건 저것 때문이었을까? 수모와 단련 끝에 감옥살이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이 땅을 택할 만큼 이 땅에 더 있는자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래, 참 국가원수를 광신하지 않을 자유가 있었지. 나는 쓸쓸하게 자조했지만, 한편 그 정도의 자유도 태산만한 희망이었다. - P260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찰나적으로 사고의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옆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 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붙은 빈 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 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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