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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여자
안트예 라비크 슈트루벨 지음, 이지윤 옮김 / PADO북스 / 2025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일 밤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3차선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와 마가목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이곳의 소리다.‘
안트예 라빅 슈트루벨의 『푸른 여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 아디나는 세상의 소리를 듣고 풍경을 바라보지만, 정작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침묵으로 둘러싸인 세계 속에서 그는 자신이 속한 자리와 언어를 잃어간다.
체코의 작은 마을에서 자란 아디나는 더 넓은 세상을 꿈꾸며 서유럽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서독 출신 남성의 권력과 차별이다. 그들은 아디나를 ’동유럽 여자‘라는 틀에 가두고, 그 중 한 남자는 위계를 이용해 그에게 폭력을 가한다. 아디나는 피해를 말하려 하지만, 사회는 그를 외면하고 침묵으로 응답한다. 슈트루벨은 감정의 폭발 대신 절제된 문장과 단절된 리듬으로, 목소리를 빼앗긴 여성이 겪는 고립과 소외를 담아낸다.
’푸른 여자‘는 그런 아디나의 분열된 내면이자,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형상화하고 있다. 푸른색은 자유의 색이자 멍의 색이다. 이 푸른 빛은 상처가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과정, 즉 사회가 외면한 고통이 개인 안으로 흡수되는 모습을 상징한다. 슈트루벨은 이 푸른색을 통해 슬픔과 냉정, 기억과 망각이 뒤섞인 정서를 시적으로 그려낸다. 『푸른 여자』는 단순히 폭력의 서사를 넘어, 현재까지도 동서를 가르고 유럽에 남은 권력의 비대칭과 젠더의 불평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할 상징은 ’꼬마 모히칸‘이다. 아디나가 반복해 떠올리는 이 단어는 체제 밖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자유인이자, 사회에 포섭되지 못하는 고독한 자아의 이미지다. ’푸른 여자‘가 상처의 그림자라면, ’꼬마 모히칸‘은 그 상처 속에서도 살아 있으려는 본능이다. 아디나는 폭력 이후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잃었지만, ’모히칸‘이라는 허구적 이야기를 통해 우회적으로 자신을 말한다. 침묵을 언어로 바꾸는, 상처의 서사적 방식이다.
그래서 결말부의 이 문장이 좀 더 특별해진다.
”오늘 벽으로 들어갈 사람, 벽으로 사라져 버릴 사람은 모히칸이 아니라 그다. 벽에는 유령만 살기 때문이다.“
이는 작품 전체의 의미를 담는다. ’벽‘은 분단의 흔적이자, 현실과 기억, 생과 사의 경계선으로 보인다. 아디나를 짓눌렀던 폭력과 체제의 잔재는 사라지지 않고 유령처럼 남아 그녀를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 벽 속에 갇히는 이는 더 이상 아디나가 아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침묵을 스스로 깨뜨리고, 푸른 여자의 빛으로 다시 걸어 나간다. 이 문장 뒤로 계속되는 푸른 여자가 어딘가 자유로워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슈트루벨의 이 소설은 사라짐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목소리, 그 미세한 떨림에 대한 기록으로, 아마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