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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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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시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너무도 오래된 문장이다.

  쿵쾅쿵쾅 마음의 진동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애써 아닌 척 가만히, 가만히 스며들듯 걷던 길 저편에 첫사랑. 같던, 시(詩)의 사원을 열어준 첫 시. 윤동주의 서시. 교실 청소를 마치고 남은 시간 위로 어느새 내려앉은 노을을 밟으며 그의 시가 내 온몸에 다 스며들 때까지 발음하다 보면 친구들의 수다가, 깔깔거림이 별빛처럼 아늑해지던 시절을 만들어준 시인, 윤동주. 허나, 모든 처음은 처음이어서 처음 그 자리에 남겨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첫사랑이 옛사랑이 되는 동안 가끔씩, 그리고 아주 가끔씩 충혈된 눈동자로 처음을 돌아보는데 그건 오래된 문장, 너무도 오래된 문장이어서 네가 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아픔도, 가만가만 스며들듯 걸어도 기어이 새어나오던 설렘도 없이 다만 수억광년 전에 내뿜은 과거의 잔영을 바라보듯 그렇게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는데

 

 이 소설, <별을 스치는 바람> 168 페이지에 나타난 '서시' 앞에서 하,

 탄식이 뿜어져 나왔다.

 너는 언제 한 번 이렇게 순결한 영혼이었던 적 있었나

 이렇게 고담(高淡)한 순결로 걸었던 적 있었나

 고개,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나, 다시 그의 시를 외던 노을진 운동장에 세워놓아도, 문을 열고 시의 사원으로 들어가던 그 시절로 돌아간데도 나는 이런 문장을 쓸 수는 없으리라. 아무런 치장 없이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는 자의 높고 담백한 순결.

 

<순결하다는 것은, 순결한 영혼을 가졌다는 것은 한번도 타락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수없이 타락을 경험했더라도

끝내 '순결하다'라는 의미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탈시키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순결은 순결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느냐

패배했느냐 하는 데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투쟁을 단 한번이라도 외면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 앞에 스스로 떳떳해야

한다는데 훨씬 더 중요성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 하창수, '허무총' 중에서

 

 그렇다. 그의 순결은 백지장처럼 창백한 순결이 아니다. 깨지기 쉬운 나약한 순결은 아닌 것이다. 순결과의 투쟁을 단 한번도

외면하지 않는 자의 높은 괴로움으로 그는 읊은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하, 순결과의 투쟁을 수없이 회피해온, 하늘 아래 부끄러운 이름으로 설 수밖에 없는 나의 탄식이여. 오래된 문장이 뿜어내는

숫햇살 아래 부끄러운 나여. 그러나 어쩌랴. 거기서부터 다시 걷는 수밖에. 부끄러움에 도망치지 않고 나의 문장을 쓰는 수밖에. 그러니 이 문장 앞에 나의 새로운 탄식은 그만 거두기로 하자. 수억광년 전에 내뿜은 과거의 잔영은 과거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현재 속에, 오염된 도시의 하늘에서도 여전히 빛나고 있으며,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서 책은 닳아도 책 속의 문장은 닳지 않고 새로이 빛나고 있으니, 혹 가다가 그 별이 보이지 않는다면 다시 이 문장 앞에 서야 하리라. 서서 때가 낀 눈동자를 씻어내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다시 걸어가야 하리라. 그것이 읽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길이며,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의 복강 형무소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스러져간 스물아홉의 순결한 영혼, 윤동주를 사랑하는 길일 것이다.

 

<베토벤을 사랑하는 사람은 / 베토벤을 위하여 울지 말 것 / 베토벤을 사랑하는 사람은 / 베토벤을 위하여 말하지 말 것 / 높은

음자리표가 없는 / 푸른 오선지 / 제일 윗줄에 어둠의 새 삼백 마리 / 가운데 줄에 어둠의 새 삼백 마리 / 날이 저물면 / 일제히

새들도 날려 보내고 / 소나기 소리만 남도록 할 것 / 흩어지는 새떼를 따라 / 그대의 시간도 해체되고 / 공허하리라 / 그러한 날마다 새벽까지 / 반은 잠들고 반은 깨어서 / 베토벤을 사랑하는 사람은 / 이 악보대로 연주할 것 / 베토벤을 사랑하는 사람은 새벽까지 / 베토벤을 사랑하는 사람은 새벽까지>                                                                     - 이외수, '악보적기'

 

 자, 이제 이정명이 연주하는 윤동주를 들을 시간이다. 소설은, 이정명의 윤동주는, 묻는다. '문장은 어떻게 영혼을 구원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문장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가. 그런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현실이 낙원인 자는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고통의 진창 속을 뒹구는 자, 현실의 피비린내 속에 신음하는 자, 가도 가도 칠흑 어둠뿐인 길을 걷는 자들만이 한 줄기만이라도 구원의 햇살을 원하는 법이다. 그런데 여기, 후쿠오카 형무소의 일본인 간수 스기야마는 고통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자가 아니다. 구원을 믿지 않는 자. 폭력으로 살아남아 폭력이 되어버린 자. 문장의 세계에 한 번도 발 디뎌 본 적 없는 자. 시(詩)와 대척점에 그를 놓음으로써 작가는 계속 묻는다. 시란 무엇인가. 시 나부랭이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밥이 되지 못하고, 총칼이 되지 못하는 그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강렬한 묘사도 특이한 표현도 없는 문장들이 스기야마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단어들은 그러쥔 주먹처럼 그의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스기야마는 자신을 공격한 것의 정체를 믿을 수 없었다. 총도 칼도 몽둥이도 아닌 겨우 아홉 줄의 글이 어떻게 호흡을 가쁘게 하고 얼을 빼놓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가?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읽는다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감각이라는 사실을. 한 줄의 문장을,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을, 혹은 그의 세계를 읽는 행위라는 것을.

 스기야마는 황급히 원고 뭉치를 상자에 넣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놈으로부터, 놈의 글과 시로부터. 글은 병균이며 유독한 글은 인간을 망가뜨린다. 나약한 정신, 근거 없는 동정, 터무니없는 낙관, 위선적인 화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헛된 꿈이 글에 숨어 전파된다. 교묘한 시구에 현혹되어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무위도식하는 자들,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끌려 사회를 엎으려는 터무니없는 자들, 아나키즘이라는 괴물에 전염되어 허무의 늪에 빠진 자들. 시인이라는 자들은 활자라는 독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건 헛된 믿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을 이따위로 망가뜨린 건 무식한 날품팔이나 장사치들이 아니라 배웠다는 자들이니까. 그들은 말과 글이라는 도구로 멀쩡했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도시. 비명으로 아수라장이 된 전쟁터. 죽음이 유령처럼 서성이는 거리. 눈물과 피가 문신처럼 온몸에 얼룩진 사람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글로써 전파되는 이념이 총칼을 부르는 것이든 총칼에 감금된 진실을 펜으로 드러내는 것이든 글은 힘을 갖는다. 그 힘으로 삶을 변화시킨다. 윤동주의 '서시'를 읽은 스기야마의 충격은 과장된 표현일까. 아닐 것이다. 그가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아직 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부끄러움 때문에 몸서리 쳤을 것이다. 폭력만이 사는 방식이었던 자신의 발가벗겨진 모습이 보여 불에 덴 듯한 통증을 느꼈으리라. 그런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문장의 행간 사이에 자신을 비춰보는 우물을 갖는 것. 스기야마는 윤동주의 시를, 윤동주의 세계를 읽으며 서서히 변화해간다. 그리고 자신도, 쓰기를 시작한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김수영, '폭포' 중에서)르는 법이므로. 어쩌면 진짜 변화는 거기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읽을 때보다 우리가 무언가를 쓸 때 우물은 더 넓어지고 맑아지는 법이니까. 다른 사람의 눈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사물과 세계와 자기를 바라보게 될 테니까. 하나의 낱말을 집어 올리면 그 낱말의 빛깔과 모양과 향기가, 그 낱말이 살아온 내력이 우루루 딸려 나와 우리는 그것을 보고 듣고 읽으며 거기에 자신의 숨을 불어넣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존재방식을, 놓여야할 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게 될 것이므로. 하여,

 

<시인이라는 존재의 엄숙성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시라는 양식이 원래부터 엄숙하고 고결한 품격을 타고난 것은 아니며, 그리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예술 창작의 결과물인 시는 하나의 창조적 생명으로서 시인을 간섭하고, 가르치고, 지시하고, 격려하고, 고무하고, 나아가게 하고, 물러서게도 한다. 그래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순간, 시인은 자신의 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살아갈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 무서운 진리 앞에서 시인은 엄숙해질 수밖에 없다.

............................

 아, 당신도 시를 쓰라.>

                                                                                         - 안도현,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중에서

 

 그렇게 변화되어 가던 스기야마는 어떻게, 왜 죽었을까. 최치수가 말한 대로일까 아닌 듯한데... 아직 1권밖에 읽지 않은 상태다. 1,2권이 함께 나왔는데 내가 모른 것인지, 시간차를 두고 나온 것인지 어쨌든 2권을 기다리는 동안 <윤동주 평전>을 다시 펴들었다. 생체실험의 대상자로 적국 일본의 감옥에서 죽어갔을 그를 읽는 일은 가혹하다. 그럴 수 있다면 시계를 되돌리고 싶다. 감옥을 부수고 그를 구해오고 싶다. 저 맑은 청년의 얼굴로 그를 기억해야만 하는 나라가, 시인으로 사는 삶을 천명(天命)으로 받들었던 그에게 그 천명마저 허락되지 않은 역사가 너무 아프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윤동주를, 윤동주의 세계를 읽고, 부끄럼 없는 삶을 써야 하겠다.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 푸른 역사, '송우혜는 견고한 작가이며 사학자이다. 이번에 그가 이룩해낸 윤동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문학의 순결한 초상은 이 시대가 뜻하는 문학행위의 일단이자 역사행위의 한 열매에 값하고 있다. 결코 과장하지 않고 일탈하지 않는 충실한 탐구정신과 정열과 책임이 어우러진 이 업적을 나는 크게 자랑한다.'-고은) 함께 읽기를 권해보며......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지는 과학자가 알 테지. 시인 나부랭이가 그걸 어찌 알아?”

반박할 수 없는 사실 앞에 동주는 눈썹을 늘어뜨렸다. 우주의 기원과 존재의 양상, 삶과 죽음, 자연의 본질을 시는 증명할 수 없었다. 시인이 온몸의 기름을 짜듯 쓴 시를 과학자들은 몇 줄의 공식으로 정리해 버렸다. 논리라는 무기로 결박된 시는 무의미하고, 열등하며, 필요 없는 것이 되었다. 동주는 마른 입술로 건조한 목소리를 내보냈다.

 “알지는 못해도 느낄 순 있어요. 살결을 간질이는 바람의 감촉과, 바람에 실려 가는 먼지와 작은 모래알들, 그리고 바람에 스며있는 계절의 냄새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느껴서 무엇을 하겠다고?”

 동주는 회의를 담은 물음표에 이어질 말들을 생각했다. ‘세계는 화염에 휩싸였고 청년들은 병정개미처럼 죽어 가는데…….’ 그렇다. 시는 총알을 막지 못하고 문장은 전투를 중단시키지 못한다. 어쩌면 시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공허한 시인의 위로와 초라한 시의 격문이 무슨 소용인가? 동주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의 광기가 언어를 초월해도 그 야만성을 증거할 것은 결국 언어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순결한 언어만이 가장 참혹한 시대를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동주는 담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먼 항구 쪽 하늘에 색색의 연들이 날아올랐다. 연들은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숭어 떼처럼 힘차고 빛났다. 그때 담장 너머에서 푸른 연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멀리 보이는 항구의 연들을 거느린 상어처럼 크고 맹렬한 움직임. 담장은 높고, 견고했고, 시야를 차단했다. 공간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정서적으로도 형무소와 바깥세상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동주는 손으로 눈앞에 그늘을 만들어 연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 눈빛은 무지막지한 장벽을 뚫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뭘 그리 골똘히 쳐다보나? 아이들의 연놀이일 뿐이야.”

 “보이는 건 작지만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을 말해 주죠. 연을 보면 연을 날리는 사람을 알 수 있어요. 성격이 어떤지, 나이는 몇 살인지도 알 수 있죠.”

 청년은 펄럭이는 연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눈으로 연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연을 날리는 담장 너머 아이를 상상했다.

 “열서너 살 정도의 여자아이예요. 연을 이동시킬 때 들판을 달리는 속도를 보면 어른의 보폭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아주 어린아이도 아니죠.

 날아오르는 연의 움직임과 섬세한 동작을 보면 남자아이는 아니에요. 겁 없고 호기심이 강한 데다 승부욕이 강하지만 외로움을 타는 성격이에요.”

 “어떻게 그걸 알지?”

 “다른 연들은 보일 듯 말 듯 먼 해안가에서 날아올라요. 해풍이 불어 연을 높이 띄울 수 있기 때문에 모두 그쪽으로 몰려가죠. 저 푸른 연도 일주일 전엔 그곳에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다른 연들에서 떨어져 나왔어요. 일주일을 지켜보는 동안 매일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왔어요. 다른 아이들이 오지 않는 형무소 근처에서 혼자 연을 날리는 걸 보면 항구 쪽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연을 날리는 솜씨만은 보통이 아니에요.”

 “그럴듯하군. 연의 움직임으로 연 날리는 사람을 읽는다?”

 스기야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동주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은 많아요. 원한다면 바람을 볼 수도 있죠.”

 “또 헛소리! 차라리 유령을 보여 준다면 믿지. 이 언덕에 죽은 사형수들의 유령이 헤매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고, 그걸 직접 본 간수들이 있다니까 말이야.”

 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스기야마는 속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청년에게 속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다시 한 번 속는다고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다음 날,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노역장 안에 퍼졌다.>

                                                                                                            - 이정명, '별을 스치는 바람 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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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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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수. 한겨레21에서 2000년대 작가들을 소개한 글을 읽고 이제서야 만나게 된 소설가다. 2000년대 내가 주목하는 소설가를 꼽으라면 김훈과 박민규 그리고 김애란. 작품이 나오면 그 이름만으로 무조건 클릭하게 되는 김훈과 박민규. 장편소설 하나 나올 때 되지 않았나 기대하는 김애란.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될까 김연수? 하면서 책장을 펼쳤고,  첫 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을 읽으며 단편의 맛, 좋네. 세번째 글 '뿌넝쉬'를 읽고는 바로 김연수의 다른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 소설집은 - 그녀와 그가 만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너와 내가 헤어진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진실은 언어로써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일까. 언어는 과연 진실을 진실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까. - 라는 질문에 대한 사유의 글이다. 그 글을 따라가다보니 나 역시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이해는 가능한 것일까.  

 이해하려는 아무런 노력 없이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해버린 당신이, 이해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회피한 채 자신이 쌓아올린 성 안에서 벽을 치며 울고 있는 당신이 못내 서럽습니다. 인생은 억세게도 홀로이지만 인간이란 이유로 우리는 온 우주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서둘러 사랑을 말하기 전에 긴 두레박을 타고 우물의 어두운 터널을, 그 공포를 견뎌낸 이해만이 차고 맑은 물 한 모금  만날 수 있음을, 두레박 속 웅크린 몸을 일으켜 풍덩 뛰어 들어간 이해만이 따뜻해질 수 있음을, 물과 함께 뿌리에게로 뿌리에게로 거침없이 스며드는 이해만이 사랑일 수 있음을 말하기도 전에 당신은 가버리고 어쩌면 이해하지 못했던 건 당신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디만큼 가야 온 우주를 이해하게 되나. 어디만큼 가야 우리는 사랑이 되나 // 우물 속으로 던진 돌멩이 하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애초에 나의 질문은 '이해는 가능한 것일까'는 아니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너를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그럼에도 나는 너를 이해하는가, 온전히까지는 바라지 않는다해도 이해는 사랑의 길이므로 그 길을 가고 있는가 되묻는다.     

 '해가 바뀌는 동안, 우리는 한개의 강물을 건넜다네. 그게 얼마나 긴 노정이던지. 날이 밝자, 강변에 사체들이 늘비했어. 말하지 않았나? 우리가 백전노장이라는 건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증명해. 하지만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더군. 전쟁이란 그런 것이더군. 어제 나는 죽을 수도 있었지. 하지만 오늘은 살아 있지. 전쟁터에서 나는 매일 새로 태어나는 거지. 그런 광경을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져. 하늘을 올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 거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경우는 죽은 전우의 사체를 땅에 묻고 허공을 향해 세 발의 총성을 울려 애도를 표할 때뿐이야. 전쟁터에서 들리는 세 발의 총성이란 한편으로 그런 의미야. 그건 원망도, 분노도 아니야. 그저 인간이라는 것, 그러고 나서도 또 인간이라는 것. 그걸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세 발의 총성으로 대신하는 거야. 그렇게 묻힌 전우의 청춘은 너덜너덜해진 지도상의 좌표로만 남게 되지. 그런 상황에 이르면 인간의 몸은 참으로 표현력이 부족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돼. 고작 울부짖거나 마른 눈물만 흘릴 뿐이라니. 심장을 꺼내 전우의 시신과 함께 묻어줄 수도 없고 두 눈을 줘 감긴 그 눈을 뜨게 할 수도 없다니. 그러므로 하늘을 향해 쏘는 세 발의 총성, 거기에 모든 것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거야. 알겠는가? 세 발의 총성. 그건 그런 의미야.'                                                                                                                         - '뿌넝쉬(不能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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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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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 그의 문장은 - 이라고 쓰게 된다. 그의 글은, 그의 책은 - 이라고 써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건 그의 문장들 때문일 것이다. 말이라든가 글이라는 게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듣는 것일 터인데 그의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내용을 듣는다기보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 목소리의 질감을, 목소리 가장 안쪽을 만져보고 싶어 손을 뻗는다. 손을 뻗어도 소리는 만져지지 않아 더 애가 탔고 만져지지 않는 것들은 만져지지 않는 채로 내버려두면 될 터인데도 자족을 모르는 인간의 갈증으로 나는 또 그 소리의 결을 더듬는다.

 ‘벗들아, 나는 여전히 삼인칭을 주어로 삼는 문장을 만들 수가 없다. 나는 세계의 풍경을 상처로부터 격절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삼인칭의 산맥 속으로, 객관화된 세계 속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일인칭의 가장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아마도 오래오래 그러하리라.’                 - 풍경과 상처 중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두 부류의 배우들이 보인다. 자기를 버려 완벽하게 다른 인물로 나타나는 배우와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타인을 끌어올려 다른 인물을 만드는 배우. 아마도 배우나 소설가나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김훈의 인물들은 너무도 김훈스럽다. 특히나 이번 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은 소설이라기보다 산문집을 읽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의 산문집들 군데군데 피어있던 꽃과 나무들이 젊은 날의 숲에 모여들어 그려진다. 아니, 그려진다기보다 ‘쟁쟁쟁’ 울리며 피어난다. 그 꽃들은 저기 뒷산에 오르면 볼 수 있는 꽃들임에도 세상을 다 뒤져도 볼 수 없는 꽃들일 것이다. 인간의 시선이 개입된 탓이다. 그러면 그것은 김훈의 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시선이 포개진 탓일 것이고 한순간의 멈춤도 없이 빛과 바람과 밥과 마음과 더불어 팔딱대는 생명들인 탓일 것이다. 그 생명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내 오른쪽 새끼 손가락은 끝이 휘어진 누에손가락이다. 아버지는 양쪽 새끼 손가락이 휘어져 있고, 오빠도 양쪽 손가락이 휘어졌고, 남동생은 양쪽 손가락 모두 휘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동네 아줌마들이 우리들 손가락을 보시더니 남동생을 두고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장난을 치셨다. 으앙 - 그 울음은 분명 남동생의 것이어야 했는데 울음을 터뜨린 사람은 남동생이 아니라 오빠였다. 오빠도 처음엔 동네 아줌마들의 장난에 끼어 주워온 동생이라 놀려댔었는데 울음을 터뜨리며 아니라고, 내 동생이라고 소리치던 - 그 날의 풍경이, 거울 속 나의 얼굴 안에 엄마의 얼굴이 겹쳐져오는 날과 포개져 가끔씩 먹먹하게 짠해진다.  

 그 닮음의 먹먹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내 젊은 날을 관통하던 화살이었고 불이었다. ‘가출을 할까/ 출가를 할까/ 이것은 나의 영원한 테마이다’(김승희, ‘평화일기2’) 허나 가출을 하든 출가를 하든 인간이, 인간 이상의 그 무엇이 되고 싶다는 열망은 애초에 불가능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함부로 쏜 화살’은 하늘 너머로 날지 못했고 불에 데인 상처를 핥으며 나는 그 닮음을, 인간을, 인연을 긍정할 수밖에 없어서 긍정했다. 긍정한 자리는 가끔 밝았고, 가끔 징글징글했으며 그 징글징글한 나를 내가 연민하듯 인간으로 태어난 인간이 가여웠다.

 ‘얘, 이게, 헤어진 거니? 이게 갈라선 거야? 아닌 것 같아. 아닐 거야. 도장을 찍는다고 갈라서지는 것도 아니고 아파트 따로 얻어서 산다고 갈라서지는 것이 아니란 말야. 이건 끊어지지가 않는 거야’ -p252

 ‘아이구, 불쌍해라. 불쌍해서 어쩌나. 불쌍하다, 불쌍해...... 너무 불쌍해......’ -p329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아버지에게서 딸에게로 그리고 딸과 만나는 남자에게로 그렇게 끊어지지 않는 인연을, 인간의 한 세상을 가여워하는 작가와 함께 눈물겨웠다 이 책을 읽으며. 그리고 연주와 김중위가 그들이 짊어져야 할 밥과 꿈과 고뇌 속에서도 사랑하기를. 우리도 그러하기를. 가엾음 속에서도 사랑하기를. 아니 서로 가여워하며 사랑하기를.

 ‘부처가 생명의 기원을 말하지 않은 것은 과학적 허영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산천과 농경지와 포구의 생선시장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창조나 진화는 한가한 사람들의 가설일 터이다. 

 구름이 산맥을 덮으면 비가 오듯이, 날이 저물면 노을이 지듯이, 생명은 저절로 태어나서 비에 젖고 바람에 쓸려갔는데, 그처럼 덧없는 것들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눈물겨웠다.  

돌이켜보니, 나는 단 한 번도 ‘사랑’이나 ‘희망’ 같은 단어들을 써본 적이 없다. 중생의 말로 ‘사랑’이라고 쓸 때, 그 두 글자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부재와 결핍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 같아서 겁 많은 나는 저어했던 모양이다.  

 그러하되, 다시 돌이켜보면, 그토록 덧없는 것들이 이 무인지경의 적막강산에 한 뼘의 근거지를 만들고 은신처를 파기 위해서는 사랑을 거듭 말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사랑이야말로 이 덧없는 것들의 중대사업이 아닐 것인가.  

 산천을 떠돌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산천은 나의 질문을 나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래서 나의 글들은 세상으로부터 되돌아온 내 질문의 기록이다.
 여생의 시간들이, 사랑과 희망이 말하여지는 날들이기를 나는 갈구한다.‘
                                                                                                                               - 2010년 가을에
                                                                                                                                        김훈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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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내게로 왔다 3 - 내가 사랑하는 젊은 시 시가 내게로 왔다 3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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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아진 시들을 다 읽고 나서 세상을 둘러보니 나는 딴 세상에 와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달라져 있는지, 답답한 굴속을 막 빠져나온 후련함을 맛보았다.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나는 쉽게 말해왔다. 우리 시가,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고 쉽게도 젊은 시인들을 외면해왔다. 추억은 사람들을 게으르게 하고 이것저것 쓸데없이 '보수'하게 만든다.  
   

 ‘쓸데없이 보수하게 만드는’ 속수무책 세월 속에서
 젊은 시의 수혈이 필요했다.
 헌 부대에 새 이름들의 팔딱임을 부어줄 때가 되었다.
 그래서 집어든 이 책,
 낯선 시인들의 피가 날 팔딱이게 한다.  

 시는 발견이다

 걷다가 걷다가 숨이 똑, 멎는 순간이 있지. 시계가 멈추고, 배경이 한 줌 재로 허물어지고, 너의 머리결은 팔랑거리는데 바람은 불지 않던 순간. 네가 내게로 오던 순간 말이야. 낡고 진부한, 흔하디 흔한, 널리고 널린 그까짓 사랑을 앞에 두고 너, 어디 있다 이제야 나타난 거야, 호들갑스럽게 '유레카'를 외치던 날 말이지. 결국은 등 돌리고 자게 될 걸 뻔히 알면서도 들숨을 쉬던 내가 너의 날숨에 맞추려 숨을 참던, 네가 펼쳐놓은 세계가 헛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알면서도 왜 세계는 어제와 똑같은지 이해되지 않던, 너를 발견한 순간들 말이야.  

 닳고 닳아 젊은
 낡고 낡아 새로운
 좋은 시를 발견한 날의 호들갑스러움
 그리고
 ‘질투는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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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양자론 뉴턴 하이라이트 Newton Highlight 2
일본 뉴턴프레스 엮음 / 아이뉴턴(뉴턴코리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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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왜 태어났는가. 사람은 왜 태어났는가. 지구는? 우주는? 

 꽤나 오래된 이 질문들 덕에 물리를 알고 싶었었다. 허나 이 분야와는 거리가 먼 머리 덕으로 관련 서적을 읽어도 알쏭달쏭 따라주지 않는 머리를 쥐어박거나 읽다가 던져버리기 일쑤였는데 오호라, 월척한 이 기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제목에 딱 맞는 책이다.  

 그림이 크다. 그렇다고 설명이 부실하진 않다. 알기 쉬운 예들이다.('미시세계란 대체로 원자나 분자 크기, 즉 1000만 분의 1밀리미터 이하의 세계. 야구공와 그 표면에 있는 원자의 크기의 비율은, 지구와 그 표면에 있는 유리 구슬의 크기의 비율과 대체로 같다.') 그리고 방정식의 나열로 머리에 쥐나지 않게 하면서 원리를 설명한다. 사실 이 정도야 아는 사람에게는 상식에 속할테지만('터널 효과, 간섭 현상' - 여러 명의 네오가 동시에 나타나거나 벽을 뚫고 나가는 네오가 등장하는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인들은 이런 과학이론을 토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들 있었던 것인데..매트릭스를 또 보고 싶어졌다.)  나처럼 이쪽 분야에 무지한 사람에게는 입문서로 좋을 듯한 책이다.  

  같이 보면 좋을 책. 김태연의 수학 소설 '이것이다'  

 사실 김태연의 '이것이다'를 먼저 읽었다. 수학 소설? 생소한 타이틀에 구미가 당겨 읽었고, 수많은 이론을 몰라도 술술 읽히지만 알고 보면 더 재미있겠지!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0에서 1이 나왔다? 무(無)에서 유(有)가 나왔다? 공(空)에서 우주가 탄생했다? '  다시 불교와 과학이군. 예전부터 나는 불교가 우주의 비밀을 푸는 과학일 거라 막연하게 생각하곤 했었는데 

 이경숙의 '마음의 여행', '기의 여행'을 다시 읽어야 하나 

 불교, 주역, 물리, 우주, 인간, 나, 마음...... 연결된 책 좀 누가 소개시켜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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