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느린 작별
정추위 지음, 오하나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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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푸보는..

68세의 노학자가 되어 정년을 2년 앞두었을 때 40년간 동고동락했던 남편이 치매 진단을 받는다. 남편은 수학 교수였지만 날이 갈수록 언어와 기억을 잃는다. 이 책에는 배우자를 하루하루 잃어가는 사랑과 슬픔, 불안과 무기력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언어학자의 기록이 생생하게 적혀있다.

p 64 나는 푸보와 의사소통이 되지 않은 후에야 비로소 말이 통하지 않는 무력감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귀 닫고 내 말을 안 듣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렇가.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었다. 우리 사이의 교류는 그렇게 단절되었다.

일상의 전쟁

p 115 마음속 치열한 전쟁 끝에 나는 결국 푸보를 요양기관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공동 간병 방식을 택한 것이다. 평소에는 요양기관의 보호를 받고 응급 상황이나 입원이 필요한 때는 내가 책임지는 형태다. 나는 의지할 곳이 생겨서 좋고 푸보 역시 양질의 간병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p 147 엄마, 엄마가 그동안 아빠를 얼마나 정성스레 보살펴 왔는지 잘 알아요. 아빠를 보내는 게 쉽지만은 않은 것도요. 하지만 이대로는 얼마 못갈거예요! 엄마가 건강해야 아빠도 안심하고 계속 엄마한테 의지하죠.

p 152 용변을 최대한 손으로 받아내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내가 미처 손을 뻗기도 전에 이런 일을 겪어본 적도 없는 란란이 먼저 아무 망설임없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 순간 울음이 터졌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와중에도 아빠를 향한 딸의 사랑이 보였다.

배우자가 상대방이 아파가는 것을 지켜보며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못내 마음 쓰인다. 아버지 병상에서도 밤을 지새며 화장실 수발하며 이런 저런 심부름을 하던 모습을 엄마가 애잔하게 보시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푸보의 기억 저너머

p 153 모든 수속을 끝내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푸보는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 격리공간으로 가는 내내 우리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날은 그저 까맣게 잊어버릴 수많은 하루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p 160 "선생님,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사모님이 오셨잖아요." 푸보는 미소 띤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p 162 엄마, 너무 슬퍼 마세요. 아빠 반응을 그렇게 담아두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우리는 지금처럼 아빠를 사랑하고 있으면 돼요.

p 211 한번은 푸보가 간호사와 함께 춤을 추는 영상을 받았다. 음악에 맞춰 스템을 밟으며 우리가 젊었을 때 유행했던 지르박을 추는 게 아니겠는가! 아, 그가 아직도 미국 유학 시절 매년 5월 졸업식 전야에 열리전 댄스파티를 기억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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