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기억을 지워주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
빨간 마스크나 사람 얼굴을 한 개처럼 도시 전설로 떠도는 정체 불명의 괴인이지만 그리 무섭지 않고 오히려 찾아가 내 기억을 지워달라 요청하고 싶은 존재.
초록색 벤치에 앉아 있으면 다가와 원하는 기억을 지워준다고도 하고, 기억을 지우는 게 아니라 먹는 거라고도 하고, 회색 코트를 입었다거나 혹은 여자라거나 무수한 소문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도쿄 근교에서 떠도는 구전일 뿐 누구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한다.
혹은 모두 잊었거나.
료이치는 어릴 적 이웃 동생인 마키가 하루 만에 충격적인 기억을 잃은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매번 어떤 남자와 한 학생이 함께 있는 걸 보고 있는 꿈을 꾸며 꼭 도망치라는 생각을 하며 잠에서 깬다.
그는 회식에서 만난 선배 교코를 좋아하게 되고 교코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병적으로 무서워하는 걸 알고 도와주려 한다.
집에 데려다주면서 익숙해지게 하며 8시가 되기 전에 꼭 집으로 가는 교코를 늦은 시간에 혼자 가도록 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같이 있어도 무섭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기억술사의 이야기를 꺼내던 교코가 본격적으로 기억술사를 찾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 얼마 뒤 료이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교코를 만나고 밤길에 대한 무서움과 함께 자신에 대한 기억까지 모두 잊어버린 걸 알게 된다.
얼마 뒤 변호사이자 선배인 다카하라의 강의에서 교코를 떠보기 위해 기억을 잊게 만든 것도 죄가 되는지 기억술사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고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교코에게 체념한다.
며칠 후 단 한 번 만난 다카하라가 휴대폰으로 전화하며 친한 사이인 듯 말을 걸어오는 사실에 료이치는 당황하고 자신이 다카하라를 몇 번 만나 기억술사에 대한 정보를 나누었고 그 사실을 잊었다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을 포함해 세 번의 기억술사와 관련된 기억상실을 겪은 료이치는 기억술사를 찾기로 한다.
10여 년 뒤 여고생인 나쓰키에게 이노세라는 신문기자가 접근해 4년 전 빵집에서 일어났던 단체 기억상실 사건에 대해 묻는다.
4년 전 나쓰키가 다니던 중학교 근처 빵집의 점원이 백지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기억을 잃었고 그 날 4명의 여학생 또한 부분적인 기억을 잃었으며 그 중 한명이 나쓰키였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나쓰키에게 이노세는 사실 점원은 그 4명 중 한명을 추행했었고 그 사실을 4명끼리는 알고 있었지만 그날 이후 아무도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었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기억술사가 연루된 것이라 말한다.
이노세는 그리고 잠잠했던 기억술사가 최근 다시 활동을 시작했고 4년 전 그날 빵집을 다녀갔던 나쓰키와 소꿉친구인 메이코를 기억술사로 의심하고 있다고 말하며 기억술사를 찾는 일에 협조해 달라 한다.
그리고 친구인 메이코의 결백을 밝히고 지키기 위해 나쓰키는 이노세와 기억술사를 찾기로 한다.
기억술사, 말 그대로 기억을 지워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 단순하다.
기억술사가 누구인가가 이 책의 질문이고 그 답은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기억술사를 쫓는 사람과 기억술사를 대치시키며 이야기를 진행시키지만 그보다는 곁가지로 볼 수 있을 기억을 지우려는 사람들과 지워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거기에 현재의 이야기들로 조금씩 상황을 진전해가는 구조다.
애초에 기억술사를 쫓는 것부터가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터무니 없는 상대이니 대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기억술사는 왜 혹은 어떻게 기억을 지우는가.
왜 기억을 지울까, 료이치와 이노세가 기억술사를 반대하며 열심히 주장하는 의견들에서 이 질문은 수없이 반복된다.
잊혀진 사람들에게 기억술사는 잔인한 존재다.
기억을 지워주는 조건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상처를 벗어날 기회를 박탈한 채 도망치도록 돕는 것은 누구를 위한 일인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실수하는 사람이면서 누군가를 바꿔놓을 권리가 있는지.
아픔으로 기억되기 싫어서 타인의 기억을 지워주길 바라는 다카하라, 전처럼 돌아가고 싶어서 기억을 잃기로 한 마사오, 기억을 잃고도 같은 길로 가버린 리사, 모든 걸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기억을 없애기로 한 마리야.
기억을 잊는다고 무조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누군가를 위해서 한 일이 때로는 선의가 될 수도 악의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이 결정한 일임에도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면 너무나 한심하고 후회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그것을 발판삼아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아마 전하고자 하는 말이겠지.
포근하고 따뜻한데 은근히 무거운 이야기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다 읽고 나니 ‘듀라라라’가 갑자기 떠올랐다.
비슷한 느낌이다.
그나저나 시리즈인데 한 편 당 한 명 씩 번역자가 있는 책은 처음 보는 듯하다.
서로 간의 정보 공유가 부족했는지 한 단어에 다른 말을 쓰는 부분은 아쉬운 점.
그래도 읽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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