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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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소명인 듯, 참 집요하게 오랫동안 바라본다. 마침내 빛날 때까지. 마침내 종이가 타오를 때까지, 검은 점을 응시하는 그녀의 볼록렌즈는 한 꺼풀씩 투명해진다. 용기가 필요한 솔직함이 있고, 비난하기 힘든 선함이 있다. 


「월춘 장구」

제목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하면서 읽었다. 시어(詩語)럼 슬프고 아름다운 말이었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욕을 뱉어가며 억척스럽게 버티고 대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걸까. 재미있고 으스스한 우화이자 분노와 비애가 섞인 도시괴담이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피는 중요할 수 있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 결정적인 것은 피보다 삶이다. 언제나 결정적인 것은 순간이다.


「부활 무렵」

산다는 건 참 고되구나. 그런 말 나는 제대로 모른다. 순례 같은 인간 앞에서는 언제나 고개 숙이고 무릎 꿇게 된다. 


「맨발로 글목을 돌다」

감히 다가설 수 없는 상처들의 언저리를 돌며 용감하게 길어 올리는 문장들. 후기에도 쓰여 있듯 그녀의 글은 곧 그녀 자신이 되어 일어서는 듯하다.


*그녀의 글이 어디로 갈지 궁금하다. 집요하게 되새김질하는 상흔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한 번도 느슨한 적 없고 간절하지 않은 적 없던 그녀의 문장이 석류 알 같은 빛이 되어 컴컴한 어둠 속을 걷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되길 바란다.     

자신의 본질과 이질적인 것은 상흔을 남긴다. 그리고 그 상흔으로 인해, 그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아픔의 힘으로 우리는 생의 모퉁이를 돌기도 한다. 그것이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인지 아닌지는 나는 아직도 모른다.
-17쪽,「월춘 장구」

내가 틀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송을 하면 소송을 당하고 망신을 주려고 하면 가만히 서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다고 그 결과가 꼭 처음에 생각했던 그것은 아닐 거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살자리가 죽을 자리가 되고 죽을 자리가 살자리가 된다. 내가 행복이라고 생각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움켜쥐었던 그것이 재앙이었으며 죽기를 각오하고 손을 놓자 오히려 상실은 나에게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보며 단지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0~41쪽,「월춘 장구」

"저 애에게 젖 한번 배불리 먹여준 적이 없습니다. 아침에 젖 먹이고 나가서 점심때 또 한 번 젖 주고 저녁에 밭에서 돌아오면 어린것이 울지도 않고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갓난아기가 먹을 젖을 밭에다 짜 버리면서도 가슴이 아프지도 않았습니다. 나 힘든 생각에 저거 그냥 죽어버렸으면 솔직히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라서 그런지 키가 하도 작아서 저 애는 버스 탈 때 아직도 요금을 안 냅니다. 그러니 이대로 저 애를 보낼 수 없습니다. 당신도 에미였으니 제 심정 아실 거 아닙니까. 살려주세요, 제 딸을 제발 살려주세요……."
-140~141쪽,「부활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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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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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문장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내 마음에 우물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쓸쓸하고 슬프지만 싫지는 않으며 어떤 아픔인지도 모르는 아픔이 되살아났다가 스러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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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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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롭고 평화로운 생활을 소재로 한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묘사하는 것도 아닌데 김훈의 문장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문장에 감정을 배제해서 담담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그 문장에서 적요한 어떤 감정이 아주 깊게 느껴진다. 서정시가 가진 절제의 매력이 담긴 것 같기도 하고. 인생이란 너무 중요한 것이라 진지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한 사람의 생과 감정이란 우리가 함부로 파고들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저 사실과 구체 묘사에 집중하는 것일까. 그의 문장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내 마음에 우물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쓸쓸하고 슬프지만 싫지는 않으며 어떤 아픔인지도 모르는 아픔이 되살아났다가 스러지는 듯하다.  


그리스신화에 힘겹게 바위를 밀어올리는 일을 반복하는 시시포스가 있다면, 김훈의 세계에는 사람을 태우고 작은 원을 돌고 도는 늙고 지친 말이 인간의 형상을 대신하고 있다. 보잘것없는 생물들의 희망 없는 견딤이 숭고하다. 두렵고 피하고만 싶던 일들은, 종이 위에 수직으로 가만히 내려 찌르는 만년필의 펜촉을 따라 잉크가 퍼지듯 조용하고 섬뜩하게 실현된다. 이런 삶의 현상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쪽도, 마지막까지 배척하며 싸우는 쪽도 문학에서는 위대하게 그려질 수 있다. 실제로는 이 두 방편이 번갈아가며 삶을 밀고 나가는 것 같다. 

─니미, 사람이나 들짐승이나 먹는 건 다 마찬가지다. 이것저것 들쑤셔서 겨우 먹는 거지. 근데, 사람이 소보다 더 먹는 것 같아.
-24쪽

추운 날 너를 생각했어. 추위가 천지간에 가득 차서 피할 곳이 없을 때 고지에 들어가 있을 너를 생각했고, 너의 추위를 생각하니까 내 마음이 더워졌어. 야생동물처럼 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몸을 잘 간수하기 바라. 요즘엔, 우리가 아무 데도 기댈 곳 없이 제 구멍을 제가 파고 스스로를 핥아야 하는 야생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31~32쪽

한 생애가 연습으로 끝나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어. 이건 자위가 아니고 당면한 현실이야. 난 요즘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있어. 상업 영어반에도 수강 신청했어.
-33쪽

형은 아버지를 피해 다니려다가 또 다른 수렁에 빠져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난 여기서 살 거야.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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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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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은 한 사람 몫의 삶을 제대로 살거나, 한 사람의 사랑을 제대로 받는 것을 원했다. 그녀들의 결혼 생활은 어느 쪽도 허용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들만의 불행일까. 1993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20년도 더 전에 쓰인 이 소설 속 여자들의 설움이 지금은 다 씻겼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조용히 울다 지쳐 분노한 여자들이 들고 일어선 2016년이었다.      

 

​덮어놓고 한국 남자 운운하며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남자도 타성에 물들어버린 어리석은 인간일 뿐인데 처음부터 완벽하게 여성 해방을 이뤄주는 남자를 기다리는 것 또한 신데렐라 같은 망상이 아니냐고, 불완전하지만 노력하는 사람끼리 함께 손 잡고 갈 수는 없겠냐는 선우의 간절한 목소리마저 귀 막고 싶은 것이 아니다. 혼자서 싸우기가 너무 피곤했다고, 더 이상 자기를 몰아세우지 말아달라는 혜완의 지친 목소리로 말하고 싶다. 억울해하지만 말고, 조금만 더 들어달라고. 당신들이 무신경했던 부분들에 대해. 한남은 뭐고 메갈은 또 뭔가. 아프고 슬픈 진통 끝에 모든 악의적인 낱말들이 지워지고 인간 대 인간으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도해본다.

그런 날이 온다면, 이 소설을 읽고 남녀 문제를 떠나 한 인간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길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서나 비평서가 아닌 문학 작품이기에 이 소설은 결국 인간의 선택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선택은 어설프고 책임은 몰랐던 시절, 인생이 억울해 자주 울었던 나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책임을 알아도 억울한 날은 있고 평생 어설프게 살다 가겠지만 무소의 뿔처럼 단단한 무엇 하나 가슴에 지니고, 내 길을 긍정하며 반 발자국씩이라도 내디디며 천천히 가고 싶다.

 

 

그렇다고 해도 곧 더 힘든 시간들이 오리라는 걸 혜완은 알고 있었다. 극복해냈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면, 환영처럼 그 겸딤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그 불안정한 시기들을 견뎌야 하리라.
-150쪽

하지만 그것은 혜완의 선택이었다. 다만 그 선택 속에는 예기치 않았던 상황들이 늘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가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고 싶어 했다.
-272쪽

"어떻게 다 달라고 하겠니? 어떻게 감히 모든 게 다 내 맘대로 이루어지길 바라겠니? 신은 모든 걸 그렇게 다 주시지는 않는다. 그래서 난 널 택했던 거다. 부디 네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아무리 어려워도 섣부른 생각 먹지 말아라……."
-336쪽

모욕 같은 건 누구나 다 겪어. 다만 우리들은 그것을 덜 겪으면서 살 만한 환경이었고 따라서 그것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호들갑을 떨 뿐이야. 그저 호들갑을 떤 것뿐이야. 걱정하지 말고 가서 잘 살아.
-340쪽

우리들은 그저 모욕을 당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호들갑을 떨었을 뿐이라고 선우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익숙해지기 전까지 모욕은 모욕이었고, 그리고 떨림은 떨림이었다. 그리고 언제면 대체 모욕에 익숙해질 것인지는 혜완도 알 수 없었다.
-347쪽

"넌 내게 기대고 싶었던 거야. 어떤 사람도 믿을 수 없다고 내게 소리를 질러가면서 넌 내 옷자락을 붙들고 있었던 거야."
-356쪽

"이 세상에 전적으로 그것이 다인 그런 이유는 없어. 넌 여자들의 아픈 삶에 대해 나에게 누누이 역설했고 우리들의 몸에 밴 봉건성에 대해 성토했지만 넌 한 가지는 간과했어. 그건 바로 그런 점이야. 그렇게 불완전한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애쓰지 않으면 문제는 남을 수밖에 없다는 거. 넌 그걸 잊었었어. 넌 남자가 홀연히 여성해방의 깃발을 들고서 나타나주기를 바랐던 거야. 그게 너의 함정이었어. 그건 신데렐라의 왕자님이 유리 구두 대신 깃발을 들고 나타나는 것과 다르지 않아. 그래서 내가 그 깃발을 쭈뼛거리며 들까 말까 망설였을 때 너는 그 깃발을 들고 망설이는 나의 손을 같이 잡아주는 대신 날 비난하기 시작했지. 너 역시 왕자님을 기다렸던 거야. 니가 경멸해 마지않던 그 신데렐라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거지."
-357~358쪽

"왜 그런 불완전한 니 자신과 이렇게 불완전한 내가 함께 조금씩 극복해가면서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다른 말을 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거니? 그리고 왜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렇게 부끄럽게 생각하는 거니?"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아!"
혜완이 선우의 말을 자르면서 대꾸했다.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아…… 이유를 말해줄까, 그건 내가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야. 내가 세상이기 때문이고 세상이 이미 내게 와 있기 때문이야. 영선이를 보면서 그 애가 얼마나 힘들어하는 줄 보고 있으면서 이혼하지 말라고 설득하고 싶은 게 나야. 혼자서 싸운다는 것은 너무 피곤하니까. 너무 피곤했고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었어."
혜완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택시를 불렀고 거의 일차선에 잠시 멈춘 차를 차도로 쫓아 나가 잡아탔다. 선우의 망연한 모습이 멀어졌을 때 혜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선우의 말은 옳았다. 그걸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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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경제학 에세이 - 한진수 교수와 함께 경제학으로 세상 바라보기 해냄 청소년 에세이 시리즈
한진수 지음 / 해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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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으면 좋고 적으면 나쁘다. 나 한 사람의 돈만 생각하면 단순하다. 그래서 그저 열심히 벌고 모으고 쓴다. 그러나 수천 사람의 돈을 생각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만 가지 사연으로 돈이 나가고 들어온다. 오만 가지는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어서 거대한 흐름을 만들고 변화를 일으킨다. 거대한 흐름 속에 내가 있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돈을 운용하면서부터 얼마간 복잡한 사람이 되기 시작한 것 같다. 어떤 사람의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어디에서나 적응하는 법이란다. 

경제학도 예술처럼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어려움은 상상력의 부족에서 오는 것 같다. 다만 나는 '희소한 자원을 최대한 잘 활용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날의 연속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몸져누워 며칠을 꼼짝 못하게 돼버리기 전에 오늘 몇 시간 쉬어두기로 하는 결정 같은 것. 호감 있는 사람의 고백을 거절하고 솔로여서 얻을 수 있는 편익을 택하는 것.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공부도 하고 연애도 하고 싶지만 시간과 체력과 돈이 희소하므로.

구두쇠처럼 무조건 돈을 쓰지 않고 모으거나 굶으면서까지 절약하는 행위는 결코 ‘경제적‘이지 않다. 희소한 자원을 최대한 잘 활용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욕구를 충족하려는 성향을 ‘경제적‘이라고 부른다.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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