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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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롭고 평화로운 생활을 소재로 한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묘사하는 것도 아닌데 김훈의 문장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문장에 감정을 배제해서 담담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그 문장에서 적요한 어떤 감정이 아주 깊게 느껴진다. 서정시가 가진 절제의 매력이 담긴 것 같기도 하고. 인생이란 너무 중요한 것이라 진지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한 사람의 생과 감정이란 우리가 함부로 파고들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저 사실과 구체 묘사에 집중하는 것일까. 그의 문장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내 마음에 우물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쓸쓸하고 슬프지만 싫지는 않으며 어떤 아픔인지도 모르는 아픔이 되살아났다가 스러지는 듯하다.  


그리스신화에 힘겹게 바위를 밀어올리는 일을 반복하는 시시포스가 있다면, 김훈의 세계에는 사람을 태우고 작은 원을 돌고 도는 늙고 지친 말이 인간의 형상을 대신하고 있다. 보잘것없는 생물들의 희망 없는 견딤이 숭고하다. 두렵고 피하고만 싶던 일들은, 종이 위에 수직으로 가만히 내려 찌르는 만년필의 펜촉을 따라 잉크가 퍼지듯 조용하고 섬뜩하게 실현된다. 이런 삶의 현상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쪽도, 마지막까지 배척하며 싸우는 쪽도 문학에서는 위대하게 그려질 수 있다. 실제로는 이 두 방편이 번갈아가며 삶을 밀고 나가는 것 같다. 

─니미, 사람이나 들짐승이나 먹는 건 다 마찬가지다. 이것저것 들쑤셔서 겨우 먹는 거지. 근데, 사람이 소보다 더 먹는 것 같아.
-24쪽

추운 날 너를 생각했어. 추위가 천지간에 가득 차서 피할 곳이 없을 때 고지에 들어가 있을 너를 생각했고, 너의 추위를 생각하니까 내 마음이 더워졌어. 야생동물처럼 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몸을 잘 간수하기 바라. 요즘엔, 우리가 아무 데도 기댈 곳 없이 제 구멍을 제가 파고 스스로를 핥아야 하는 야생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31~32쪽

한 생애가 연습으로 끝나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어. 이건 자위가 아니고 당면한 현실이야. 난 요즘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있어. 상업 영어반에도 수강 신청했어.
-33쪽

형은 아버지를 피해 다니려다가 또 다른 수렁에 빠져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난 여기서 살 거야.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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