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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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은 한 사람 몫의 삶을 제대로 살거나, 한 사람의 사랑을 제대로 받는 것을 원했다. 그녀들의 결혼 생활은 어느 쪽도 허용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들만의 불행일까. 1993년에 출간된 소설이다. 20년도 더 전에 쓰인 이 소설 속 여자들의 설움이 지금은 다 씻겼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조용히 울다 지쳐 분노한 여자들이 들고 일어선 2016년이었다.      

 

​덮어놓고 한국 남자 운운하며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남자도 타성에 물들어버린 어리석은 인간일 뿐인데 처음부터 완벽하게 여성 해방을 이뤄주는 남자를 기다리는 것 또한 신데렐라 같은 망상이 아니냐고, 불완전하지만 노력하는 사람끼리 함께 손 잡고 갈 수는 없겠냐는 선우의 간절한 목소리마저 귀 막고 싶은 것이 아니다. 혼자서 싸우기가 너무 피곤했다고, 더 이상 자기를 몰아세우지 말아달라는 혜완의 지친 목소리로 말하고 싶다. 억울해하지만 말고, 조금만 더 들어달라고. 당신들이 무신경했던 부분들에 대해. 한남은 뭐고 메갈은 또 뭔가. 아프고 슬픈 진통 끝에 모든 악의적인 낱말들이 지워지고 인간 대 인간으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도해본다.

그런 날이 온다면, 이 소설을 읽고 남녀 문제를 떠나 한 인간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길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서나 비평서가 아닌 문학 작품이기에 이 소설은 결국 인간의 선택과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선택은 어설프고 책임은 몰랐던 시절, 인생이 억울해 자주 울었던 나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책임을 알아도 억울한 날은 있고 평생 어설프게 살다 가겠지만 무소의 뿔처럼 단단한 무엇 하나 가슴에 지니고, 내 길을 긍정하며 반 발자국씩이라도 내디디며 천천히 가고 싶다.

 

 

그렇다고 해도 곧 더 힘든 시간들이 오리라는 걸 혜완은 알고 있었다. 극복해냈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면, 환영처럼 그 겸딤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그 불안정한 시기들을 견뎌야 하리라.
-150쪽

하지만 그것은 혜완의 선택이었다. 다만 그 선택 속에는 예기치 않았던 상황들이 늘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가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고 싶어 했다.
-272쪽

"어떻게 다 달라고 하겠니? 어떻게 감히 모든 게 다 내 맘대로 이루어지길 바라겠니? 신은 모든 걸 그렇게 다 주시지는 않는다. 그래서 난 널 택했던 거다. 부디 네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아무리 어려워도 섣부른 생각 먹지 말아라……."
-336쪽

모욕 같은 건 누구나 다 겪어. 다만 우리들은 그것을 덜 겪으면서 살 만한 환경이었고 따라서 그것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호들갑을 떨 뿐이야. 그저 호들갑을 떤 것뿐이야. 걱정하지 말고 가서 잘 살아.
-340쪽

우리들은 그저 모욕을 당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호들갑을 떨었을 뿐이라고 선우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익숙해지기 전까지 모욕은 모욕이었고, 그리고 떨림은 떨림이었다. 그리고 언제면 대체 모욕에 익숙해질 것인지는 혜완도 알 수 없었다.
-347쪽

"넌 내게 기대고 싶었던 거야. 어떤 사람도 믿을 수 없다고 내게 소리를 질러가면서 넌 내 옷자락을 붙들고 있었던 거야."
-356쪽

"이 세상에 전적으로 그것이 다인 그런 이유는 없어. 넌 여자들의 아픈 삶에 대해 나에게 누누이 역설했고 우리들의 몸에 밴 봉건성에 대해 성토했지만 넌 한 가지는 간과했어. 그건 바로 그런 점이야. 그렇게 불완전한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애쓰지 않으면 문제는 남을 수밖에 없다는 거. 넌 그걸 잊었었어. 넌 남자가 홀연히 여성해방의 깃발을 들고서 나타나주기를 바랐던 거야. 그게 너의 함정이었어. 그건 신데렐라의 왕자님이 유리 구두 대신 깃발을 들고 나타나는 것과 다르지 않아. 그래서 내가 그 깃발을 쭈뼛거리며 들까 말까 망설였을 때 너는 그 깃발을 들고 망설이는 나의 손을 같이 잡아주는 대신 날 비난하기 시작했지. 너 역시 왕자님을 기다렸던 거야. 니가 경멸해 마지않던 그 신데렐라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거지."
-357~358쪽

"왜 그런 불완전한 니 자신과 이렇게 불완전한 내가 함께 조금씩 극복해가면서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다른 말을 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거니? 그리고 왜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렇게 부끄럽게 생각하는 거니?"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아!"
혜완이 선우의 말을 자르면서 대꾸했다.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아…… 이유를 말해줄까, 그건 내가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야. 내가 세상이기 때문이고 세상이 이미 내게 와 있기 때문이야. 영선이를 보면서 그 애가 얼마나 힘들어하는 줄 보고 있으면서 이혼하지 말라고 설득하고 싶은 게 나야. 혼자서 싸운다는 것은 너무 피곤하니까. 너무 피곤했고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었어."
혜완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택시를 불렀고 거의 일차선에 잠시 멈춘 차를 차도로 쫓아 나가 잡아탔다. 선우의 망연한 모습이 멀어졌을 때 혜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선우의 말은 옳았다. 그걸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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