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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
화바이룽 지음, 김소희 옮김 / 서사원 / 2026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 화바이룽 장편소설/서사원
대만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인 화바이룽의 소설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는 이야기하는 바가 묵직하다. 사회 공동체의 근간은 가정으로, 그 기본이 되는 부부의 관계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결혼'으로 맺어져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꿈'꾸며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부부를 디폴트로 삼는 우리 사회에서 주인공 정밍런(정루이원)과 뤼정팡 부부는 결이 다른 관계를 보여준다.

자신과는 친밀하지 않지만, 아이들과는 나름의 방식으로 소통하던 남편 밍런이 갑자기 이혼을 요구한다. 으레 아내 정팡은 외도를 의심하고 남편은 부인하지만, 증거를 찾기 위해 지인에게 조사를 의뢰하는 데…….

의심에 대한 답 혹은 이혼 시 사용할 수 있는, 유리한 카드를 원한 것뿐인 아내의 선택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서 가정을 덮쳤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의 선택. 그 이유를 알아야 했기에 남편의 비밀에 천천히 다가갔다. 조금씩 드러나는 남편의 낯선 면모에 상처 입으면서도 정팡은 진실을 알고 싶어 했다. 드디어 빗장 풀린 남편의 비밀은 상상할 수 없는 파괴력을 지녔다.

화바이룽 작가는 밍런(루이원)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어린 시절 형 밍룬과 약속했던 비혼의 꿈이 형의 결혼으로 산산이 부서진 이후 밍런은 달라졌다. 결혼 생활을 코끼리 배 밑, 다리 사이에서 살아가는 거라고 말하는 그는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사는 것보다 '자신'으로 사는 것을 선택했다. '가족' 구성원으로 자신한테 부여된 최소한의 책임, 그것도 본인이 정한 몫만큼 노력하고는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인간에 대한 감정이 죽은" 밍런이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결말은 가히 충격적이고 파괴적이었다. 하지만 상황상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는 체념 섞인 이해가 되었다.
밍런보다 더 놀라운 인물은 아내 정팡이었다. 남편의 비밀을 드러나게 했다는 자책감과 배신감에 몸서리치던 그녀가 모든 비밀을 마주한 이후 보여주는 연민과 동정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밍런의 부탁을 들어주고 죽어버린 꿈을 떠나보내고 오늘을 살아가는 그녀는 다시금 희망을 품는다.
그에게는 내가 필요했으니까.
가슴 가득 차오르는 지난 기억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이 일렁인다.
'부부'라는 세계에서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신뢰하고 기대하는 가운데 상대방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상을 바라보고 있거나 눈을 감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밍런과 정팡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따라가는 내내 코끼리를 목욕시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원(밍런)이 정팡을 '친구'라 칭한 것처럼 그들의 관계는 변했다.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를 펼쳐 내밀한 비밀을 쫓는 경험은 낯설고 끔찍하지만 한편으로는 성숙해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