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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진공 붕괴/ 해도연 소설집/ 한겨레출판
좋아하는 김초엽 작가의 책을 읽고 큰아이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과 전공자가 이렇게 글까지 잘 써도 되나요? 문과생들은 어떡하라고요." 본인 또한 문과형 이과 지망생이면서 말이다. '글', '이야기'를 창조하는 능력 혹은 욕구를 인간의 본능이라 한다면, 누구나 가히 작가가 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은연중에 '작가'는 문과 카테고리에 넣고는 설레발치는 모양새다. 아이가 말할 때는 웃어넘겼지만,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보다. 나의 보편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찬란한 시간을 보냈다. 바로 해도연 작가의 [진공 붕괴] 덕분이다. 우주 전문가가 탄탄한 전문 지식과 경이로운 상상력 그리고 체험이 녹아든 이야기로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SF 장르의 신세계를 선사했다.

세 번째 작품집인 [진공 붕괴]가 해도연 작가와의 첫 만남이다. 단편으로 그려진 여섯 가지의 세계가 탄탄한 과학적 토양 위에서 줄기차게 확장되어나가는 호흡이 놀랍다. 어느 이야기 하나 단조롭지 않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한순간의 이완도 허용하지 않는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의 구조는 긴장감과 재미를 놓치지 않도록 독자를 이끈다. 여섯 편의 이야기 제각각 특색 있고 매력적인 작품들이다. 그중 <텅 빈 거품>, <마리 멜리에스>, <콜러스 신드롬>이 긴 여운을 남겼다.

과학이 토대가 되지만 인간의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감정과 욕구가 녹아있는 이야기들이라 음미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소중한 존재에게 진실을 숨기면서 얻는 행복과 안녕이 진정한 것일까? 소멸 앞에서 '본인'와 '타인'의 경계가 유의미한 걸까? 진실을 '알지 못한' 이와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이 그리고 '알았으면서도 망각한' 이 중 선택해야 한다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되돌아간다면 언제로 가고 싶은가?
해도연 작가는 하나의 글 안에서 한 가지 선택이 아닌 개개인의 성향과 입장들을 드러내는 여러 시선들을 담아내면서 독자들 스스로 고민하고 사유하도록 이끈다. 지구를 넘어서는 광활한 물리적 공간에서 인간의 지능과 본능을 초월한 외계 생명체나 인조인간 혹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자 등등 범상치 않은 세계관의 터널을 건너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부딪치고 넘어지고 놀라고 전율하며 즐길 것이다. 등장인물이 되어보기도, 상대역이 되어보기도 하면서 그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행간 사이를 탐색해 나갈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기술의 발달로도 모든 게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한계가 오히려 인간을 인간답게 지킬 수 있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같은 생각이 아닐지라도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는 그들이 아름다웠다.
해도연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 터전에서 인간의 보편적 감정(사랑, 기쁨, 행복, 환희, 부성애, 모성애…)과 가치(생명, 자유, 신뢰, 정직…)가 어떤 모습으로 피어나는지 지켜보면서 매료되었다. 우리의 지금이, 내일이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오늘 바로 이 순간 나를 감싸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생경하면서도 소중하게 다가왔다.

한겨레 하니포터10기 자격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