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
심너울 지음 / 한끼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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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너울이 창조한 세상 속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치게 만드는 이야기 -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고, 원작이 영화화되는 SF 소설가답게 눈앞에 그려지는 생생하고 감각적인 글로 독특하고도 엉뚱한 세상을 전하고 있다. 아홉 편의 단편들로 구성된 소설집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는 심너울 표 상상력을 세상에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고 있다. 


MBTI, 인공지능, 외계인, 초능력, 지구 멸망 등등 다채로운 소재로 꾸려진 이야기들은 미래 시점이지만 신기하게도 현재 시점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있다. 심너울 작가의 유머 코드와 현실 인식이 잘 녹아든 블랙코미디 같다가도 인류애 넘치는 정의로운 영웅들이 등장하는 히어로물 같다가도 세상 애절한 러브스토리가 펼쳐지니 산해진미로 가득 찬 뷔페 같다. 취향껏 즐길 수 있고, 애정 하는 등장인물의 이후를 상상할 여지가 많다. 


글 속 현실 에피소드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펜촉으로 꼬집은 현상은 현실에서나 가상에서나 씁쓸함을 동반한다.  

정부 주도로 MBTI 유형별 일자리 지원정책을 시행하거나, 국가 존망 위기에 최첨단 양자 컴퓨팅 인공지능이 내놓은 대책이 대형마트에 유통되는 대파의 가격에 관한 것이거나, 초능력자에게 배달 앱 같은 플랫폼에서 일거리를 제공하거나, 게임 시장의 열악한 개발 환경들은 현실 속 우리와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버린다. 그들의 오늘이, 더 나은 내일을 향한 선택이 절절하고 절실하게 다가온다. 



따지고 보면 진짜 초능력은 자본 아닌가 싶더라고요. 최경현이 스톡옵션으로 번 돈만 수백억이 넘는다는데 진짜 우리 힘을 부러워하겠어요? 그 능력으로 이렇게 이용되기나 하는데?

- 내 안의 영웅, 핸디히어로 205p


진부한 인간의 한계에 얽매여 있는 존재인 현우가 결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현우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었다. 이 하얀 감옥 속에서, 그는 여전히 인간성의 클리셰를 사랑하고 있었다.

- 클리셰 149p






신, 창조주, 창시자에 관한 이야기가 눈에 띈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컬럼을 쓰는 작가, 게임 개발자, 가상세계 제작가, 설계자가 미지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스스로를 '신'이라 여기는 장면들이 나온다.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 빠져들면서 도취하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다 다시 딱딱한 바닥에 발을 딛게 하는 현실 자각이 일어난다. 무기력한 좌절을 겪고도 다시 현실을 뛰어넘고자, 지키고자 나름대로 행동한다. 진부함을 이기기 위해 의식을 컴퓨터로 전송하고자 하거나 신의 버그를 눈치채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애쓰는 인물들의 선택은 흥미로웠다. 


인간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낸다. 질서를 빚는 것만큼 신적인 일이 어딨겠는가?

- 클리셰 138p






아홉 편의 단편 중 가장 인상적인 글은 <싹둑>이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합의된 규칙, 규정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데 일단 부담을 느끼는 터라, 커넥텀 네트워크를 연결하지 않은 '아이리스' 존재 자체가 크게 다가왔다. 수천 명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념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그 아이의 단단함이 놀라웠다. '소통'과 '갈등'에 대한 통찰이 인도한 의미 있는 지점이었다. 올리브는 아이리스가 말하는 진정한 소통을 스스로 서서히 깨우쳐갔다. 자아와 타아의 구분부터 다르기에 다른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소통의 본질을 말이다. 







<달에서 온 불법 체류자>는 영상으로 만나보고픈, 매력 넘치는 작품이다. 초능력자가 넘치게 된 세상에서 초능력자를 관리 ·통제하는 프로미넌스와 월인의 대치는 선악 구조로 히어로물의 포맷을 따르고 있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향연과 주인공의 뒤늦은 자각과 각성까지 볼거리가 풍성하다. 






<키스의 기원>은 극과 극인 남녀의 사랑이 이뤄낸 결말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보다 인간이 키스를 시작하게 된 연유를 '외계인의 지구 정복'과 연결 지은 심너울 작가의 상상력은 엉뚱함을 넘어 기발하였다. 이토록 평화롭고 감미로운 방법으로 이루는 지구 정복을 노리는 녹색 꼴뚜기 닮은 외계인을 본 적이 있나 싶다. 


인공지능에 관한 인간의 상반되는 시선을 보여주는데 오히려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긍정적인 여론이 뒤끓는 데, 부정적인 편의 인간이 대통령이 되도록 인공지능이 도와준다. 심너울 작가는 이 <영웅의 탄생>을 인공지능 모델의 도움을 받아 집필했다고 한다. 허를 찌르는 그의 서사는 글을 읽는 내내 즐거움을 돋우는 자극이 되어주었다. 



다양한 미래를 친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심너울표 SF 소설집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

현실의 나무에서 여러 방향으로 뻗은 가지 끝에 매달린 미래 하나를 똑~ 따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가능성을 품은 내일을 그려보는 이들이 있고, 또 읽는 이들이 있다. 심너울이 전하는, 쉽지 않지만 왠지 유쾌하고 다정한 미래 이야기가 오늘의 고단함을 녹이는 불씨가 되어주었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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