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겅클
스티븐 롤리 지음, 최정수 옮김 / 이봄 / 2024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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겅클/ 스티븐 롤리 소설/ 이봄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참았던 긴 숨을 내뱉었다. 상실의 사막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와 바스락거리는 몸을 물에 담그는, 용감한 생존자 겅클 패트릭을 보면서 울컥했다. 장장 550여 페이지 내내 끊임없이 매력을 뽐내던, 상처 입은 영혼이 그저 존재하는 데 멈추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가는 오늘에 뜨거운 무언가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바로 그렇게 하는 거야."
신랄하면서도 유쾌하고, 슬프면서도 즐거운 겅클과 조카아이들의 상실 극복기는 긴 여운을 남겼다. 극중 인물의 말처럼 아이들을 작은 어른처럼 대하는 패트릭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조카아이들 메이지와 그랜트가 패트릭을 거리낌 없이 겅클, 거프로 부르거나 에머리를 삼촌의 남자친구로 여기는 모습을 보면서 문화적 차이를 느꼈다.
"바이러스로 전멸한 세대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축하연이에요. … 차별을 당했지만 이제 정치적 힘을 지닌 집단이 되었다고요." 에머리가 패트릭에게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사회에서 그들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이는 녹록지 않은 역사를 품고 있으며, 패트릭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인 JED, 에머리는 살아가는 방식을 체득한 듯 보였다. 패트릭이 지나온 시간이 '겅클 패트릭'이라는 특별한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그의 성 정체성, 세라와의 우정, 조와의 사랑, 배우 인생 그리고 조와의 이별 등 그 모든 것들이 그를 빚어냈다. 너무나도 뚜렷하게,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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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의 이별 후 은둔 생활을 하는 패트릭에게 세라와 그레그는 자신의 아이들을 기꺼이 맡겼다. 아이들이 마주한 상실과 그가 겪었던 또 겪은 상실이 서로를 유대하고 공감하고 치유할 에너지를 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그만큼 패트릭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아꼈다. 사랑하는 조를 황망히 잃고 TV 스타로서의 영광과 인기를 묻고 슬픔을 고요로 포장하여 뜨거운 사막에서 은둔한 채 살아가는 가여운 겅클 패트릭을 생생한 공간 속으로 소환하고자 하였다.
자신이 아이들을 책임지고 돌봐야 한다는 사실에 막중한 부담을 느낀 패트릭과 엄마 세라의 부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아이들 메이지와 그랜트는 '겅클 규칙'을 만들며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서툴지만 그만의 어조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패트릭과 갑자기 부모 모두 옆에서 사라진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아홉 살 메이지와 일곱 살 그랜트 남매는 90일의 동거를 시작한다. 엄마의 죽음과 아빠의 중독 갱생 치료로 한꺼번에 빈 부모 자리를 유쾌하고 독특한 겅클 패트릭이 차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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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은 혼성어를 즐겨 사용하고 평범을 거부한다. 아마 조의 죽음 이후 그와 함께 나누고 싶었던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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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비롯한 옛날의 영광과 교류하지 않고 숨어 있던 그는 조카들과 유대감을 쌓아가며 관계로 충만한 행복감을 만끽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찍은 유튜브 영상에 반응하는 대중들을 인지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도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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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펼치는 현재의 일상과 관련 있는 과거의 추억이 교차되면서 패트릭의 내면과 상처를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 조를 잃고 또다시 십 대 시절 전부였던 자신의 사람 세라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패트릭. 그의 인생에서 소중한 두 사람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가 감내했을 아픔에 오열하고 말았다. 글 속에 갇힌 아픔이 절절하도록 느껴졌다. 그런 그에게 메이지와 그랜트는 선물이었다. 그의 사람이었다 그레그와 아이들의 전부가 된 세라가 남긴 선물.
너희 엄마가 결코 너희를 떠날 수 없듯이
너희도 엄마를 떠날 수 없어.
캐릭터들의 넘치는 매력과, 진정 어린 관계에서 배어 나오는 친밀감과 아늑함과, 상실을 외면하지 않고 일상에서 담담하게 받아들여나가는 성숙한 자세가 어우러져 만찬 같은 책 읽기였다. 패트릭처럼 오스카 와일드에 푹 빠져버렸다.
겅클 패트릭, 이제 괜찮죠?
이렇게 또 하나의 징표가 생겼다. 영원히 사라질 어린 시절의 징표.
네가 앞으로 인생이 수월해질 거라고 했잖아.
그럴 거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