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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닿았던 모든 순간
무라야마 유카 지음, 양윤옥 옮김 / 놀 / 2024년 8월
평점 :
파도가 닿았던 모든 순간/ 무라야마 유카 지음/ 다산북스
무라야마 유카 작가의 [파도가 닿았던 모든 순간]이 10년 만에 재출간되었다. 독자 요청 쇄도로 이뤄진 결과라 더 고무적이다.
1999년 출간되었던 이 작품은 당시 사춘기에 겪는 불안과 외로움, 소통 등을 섬세하게 그려내어 '영원한 청춘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기념비적인 작품이 재출간되어 우리를 찾아왔다는 소식은 벅찬 기쁨이다.
바다처럼 푸른 덧표지에는 하귤과 블루노트가 놓인 시트가 그려진 정물화가 있다. 덧표지를 벗겨보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윤슬로 뒤덮인 표지가 우리를 반긴다. 예상치 못한 자연의 찬란함에 탄복하였다. 이 소설은 어떤 눈부신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나? 들뜬 마음은 서둘러 책장을 넘기고 있다.
접점이 없을 듯한 두 주인공, 온 마음을 서핑에 빼앗긴 야마모토 미쓰히데와 공부 잘하는 모범생 후지사와 에리다.
미쓰히데는 대부분의 말이 농담이라 '가벼운 녀석'으로 통하고, 에리는 학생회 부회장으로 공부는 물론 착한 아이, 착한 딸로 통한다. 교집합이 없어 교류가 없던 이들은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치게 된다. 이 만남은 미쓰히데와 에리를 의외의 관계로 엮이게 만드는데……
"서로를 원하지만 사랑은 아닌 이 관계가
어째서 우리는 이토록 간절한 걸까?"
[파도가 닿았던 모든 순간] 캐릭터의 매력은 인물들이 세상에 비치는 이미지와 상반되는 면을 섬세한 언어로 잘 그려낸 점에 있다.
에리는 착한 아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과 성욕에 관한 고민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가슴 앓이를 한다. 미쓰히데도 싱거운 농담과 여자 관련 소문으로 경박스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진지한 부분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자연스러운 일도 막상 본인에게는
자연스럽다고 할까, 가장 마음 편한 일인 경우가 많아.
누구나 당사자밖에는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는 게
바로 그런 거겠지?"
- 미쓰히데가 에리에게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경계에 서있는 청춘들의 고민들이 현실성 있게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안팎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과 기대, 평가 속에서 불안과 외로움을 느끼는 미쓰히데와 에리는 어느새 서로가 간절해진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점점 더 빠져들면서 그 외는 공유하지 않는, 일반적이지 않는 관계에 대한 생각도 깊어져 간다.
개인적인 고민에 집안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미쓰히데와 에리의 관계도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겪고 감당하고자 애쓰면서 에리도, 미쓰히데도 '지금'을 넘어서려는 모습에서 울컥하였다. 힘들고 어렵지만, 각자 정답을 찾고자 노력하는 이 아름다운 청춘들의 몸짓이 안쓰러우면서도 다부져 보였다.
미쓰히데와 에리만큼 미야코와 다카유키의 관계도 흥미로웠다. 둘 역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른 느낌이 감지되는 포인트들이 중간중간 나와서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사람들을 사귈 때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이를 감추기 위해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지던 미쓰히데가 파도 앞에서 망설이고 달아나려고 한 물러터진 마음을, 두려움을 떨치고 덮쳐드는 파도를 뛰어넘으려 일어섰다.
미야코를 사랑하는 자신을 숨긴 채 미야코의 주변을 맴돌던, 자기 안에 꿈틀대는 욕망을 숨겨야 했던 에리가 미쓰히데에게는 진심을 말했다. 결코 사랑 따위는 아니지만 더 강할 집착을.
반드시 옳은 일만 골라서 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
[파도가 닿았던 모든 순간] 이 소설은 청춘의 불안과 고독, 단절과 소통에 관한 메시지뿐 아니라 에리와 미쓰히데의 집안 이야기를 더하였다. '청춘'을 '개인'으로서 더 나아가 '가족' 구성원으로서 '삶과 죽음'의 시간에 올려놓았다.
죽음이란 심장이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이란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를 잃어가는 것이다.
죽은 자들을 뒤로하고 끊어졌던 관계들이 다시금 이어지려는 모습 또한 흥미로웠다. 에리와 미쓰히데의 관계 또한 깊은 여운과 함께 질문으로 남는다. 풀릴까? 아니더라도 당사자들만 아는 사정이리라 생각하면 다 될 일이다. 두렵고 아프지만 '지금'을 마주하고 뛰어넘고자 고군분투하는 청춘들에게 이런 이야기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