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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사라진 정오 ㅣ NEON SIGN 8
김동하 지음 / 네오픽션 / 2024년 6월
평점 :
"쓸모없는 그림자 따위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아."
그림자가 사라진 정오/ 김동하 지음/ 네오픽션
사람들의 그림자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림자를 사 가고 슬픔을 없애준다는 그림자 상인,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판 것이다. 아니, 슬픔을 지운 것이다.
김동하 작가는 신작 <그림자가 사라진 정오>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조명한다. 그의 소설 속 사람들 대부분은 '슬픔'을 지우는 선택을 한다. 마치 슬픔만 없다면 다 괜찮아지는 것이라 믿는 듯했다. 왜 슬픈 지…… 그 감정을 일으킨 시간과 추억 등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지우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꽤나 솔깃한 제안이기는 하다.
"제게 그림자를 파시겠습니까?
동의하신다면 지금 느끼는 슬픔을 비롯해
앞으로 그 어떤 슬픔도 느끼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만약 그림자 상인 하백이 내 앞에 나타나 거래를 요구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소설 속 많은 사람들처럼 그냥 팔 것인가? 정오와 진희, 태진처럼 팔지 않을 것인가? 경계심이 많은 터라 헛소리라며 무시할 확률이 가장 높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아프기 싫어서 그림자를 팔았다.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영원히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 하백의 말은 제각각 깊이는 다를지언정 슬픔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들에게 동아줄처럼 느껴졌을 테다.
슬픔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파수꾼
슬퍼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천사
VS
슬픔을 노리는 사냥꾼
검은 속내를 숨기고 있는 악마
그림자 사냥꾼 하백, 영귀, 환생인 로혼, 영사, 사장 사자 등 기묘한 존재들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과거 - 현재 - 미래로 흐르는 절대적 시간 '크로노스'가 아닌 특정 순간을 일컫는 주관적 시간 '카이로스'를 이용하여 주제를 극대화하였다. 슬픔을 마주하기보다는 지워버린 이들에게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하백의 음모를 막기 위해 로혼, 정오, 태진은 각자 맡은 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처음에는 로혼이 자신의 임무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 망설였으나 급박한 순간에 로혼과 정오 그리고 태진이 힘을 모으게 되었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해야 할 이들이 그들인 것은 필연이었다. 사라진 기억을 하나씩 찾아가면서 밝혀지는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 가슴이 미어져 무너져내렸다. 그럼에도 진실을 알고자 정오는, 로혼은 앞으로 나아갔다. 두려움이 가득한 데도 진실을 향한 의지를 꺾지 않는 그들을 바라보며 덩달아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백은 그림자와 슬픔만 가져간 게 아니라 슬픔과 관련된 기억까지 가져갔다. 3여 년의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가는 정오나 생전 기억을 잃은 로혼과 하백처럼 기억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슬픔 또한 소중한 감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지워진 슬픔을 되찾고 싶어 했다.
우리는 기억의 복합체이다. 잊은 듯 같으면서도 특정 장소에 가거나 향기를 맡거나 음식을 먹으면 차오르는 기억들,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기억들, 소중해서 계속 되새기는 기억들…… 이 기억들 모두가 행복을 담고 있지는 않다. 슬픔, 그리움 등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 기억들 덕분에 '나'가 '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김동하 작가는 정오와 로혼, 태진과 유진을 통해 '너무나 큰 슬픔이라 지워버리고 싶다'가 아니라 '그 큰 슬픔을 느끼게 한 큰 기쁨과 충만함, 사랑을 떠올려 보라'고 이야기한다. 슬픔 전에 존재한 행복, 슬픔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대체적으로 부정적 감정에 대한 표현을 꺼려 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우리 정서상, 건강하게 발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슬퍼하고 애도하는 시간이 충분히 보장되고, 그 슬픔을 공감하고 이해해 주는 환경이 자리 잡은 성숙한 공동체라면 어떨까. 아마 소설 속 사람들처럼 쉽게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그 이면을 떠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한정오의 엄마 최진희처럼 거짓말을 할 수도, 한정오의 엄마 최진희처럼 그림자일지라도 딸을 위해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슬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잠식되지 않도록 곁에서 지켜봐 주는 그 마음이 삶으로 이어지게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고 아프지만 자신의 소중한 기억을 외면하지 않은 정오와 로혼 그리고 태진 덕분에 슬픔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슬픔이 자리하는 시간에 슬픔만이 남지 않도록 그 슬픔을 온전히 마주하는 우리를 그려보는 시간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