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종말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3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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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종말/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3/ 퍼플레인





보라와 환상의 결합으로 탄생한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바로 정보라 작가의 신작 <작은 종말>이다. 

환상문학 단편선으로 <아무도 모를 것이다><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에 이어 나온 시리즈 3번째 작품이다.




가제본 서평단 활동으로 본책에 수록된 10편의 단편 중 3편을 미리 읽어볼 수 있었다.

[지향] - [무르무란] - [개벽]

보라월드, 그가 구축한 세계를 순수한 관찰자로만 관망하기에는 버거운 게 사실이다. 이번에도 역시 읽자마자 그의 세계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지향]에서 '나와 강의 관계' 그리고 '시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서술되고 있다. 이 소설에 따르면 나(독자)는 시스젠더 이성애자로, 보통 타인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의연 중에 범주를 가족 - 친구 - 지인 - 동료 등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나와 강의 관계'는 '같이 데모하고 같이 행진하는' 사이다. 지향하는 삶이 같아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이들이 '나와 강'이다. 데모하러 가면 언제나 강이 있다. 언제나 내가 있다. 그 사실을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이다. 



'애인', '친구'가 아니라 명확히 말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적확한 라벨로 표현하는 '나와 강'의 이야기는 그들이 지향하는 삶을 차분히 하지만 열정적으로 그려낸다. 그들의 논거에 우리가 '정상성'이라 여기는 범주를 받치는 정당성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당위로 규정해버린 닫힌 계에서 열린 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빛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경탄하는 것은 본디 인간의 특권이 아닐까 싶다. 



인정받고 부여받은 정상성 안에서 살아가는 이로써 돌아보지 않았던 사회 곳곳의 목소리에 민감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 장애인권 활동가들 덕분에 나아지는 세상을 누리면서도 그 편리의 고마움보다 투쟁으로 인한 여파의 불편함만을 온전히 그들에게 전가하는 우리의 민낯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지금도 세상은 수많은 강이, '나'가, 장애인권 활동가들이 삶을 향해 나아가려 몸부림을 치고 있다. 아무런 의미도 약속도 가질 수 없는 모든 존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엄할 수 있기를 원하며 말이다. 내가 '지향'하는 삶은 '나와 강"의 시공간은 맞닿아 있을까? 우리는 정체성을 떠나 누구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되새겨본다. 




우리는 선택지를 원한다.

안전하고 합법적이고 다양한, 더 많은

선택지를 원한다. 






[무르무란]은 우리를 선사시대로 타임슬립 시킨다. 모권제 사회로, 현명한 큰어머니가 임신과 출산, 사냥과 분배 등 전반적인 사항들을 통솔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특히 사냥 지식과 기술을 이어가는 방식이 흥미롭다. 

선사시대 유적으로 남아있는 벽화를 새기고 있는 검은깃털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읽어나갔다. 벽화를 그릴 수 있는 조건이 사냥을 잘 하는 임신한 여성이라는 점이 특색 있었다. 역사에서 밝혀진 사실인지 정보라 작가의 상상력인지 모르겠지만, 선사시대 사냥-수렵 시기의 중요한 상징이 잘 녹아들어 있어서 절묘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사냥과 출산은 그 시기에 생존과 직결되는 부분이었으니 말이다. 

무섭고 두려울지라도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고야 마는 비밀과 전설의 은밀한 속내를, 강인한 의지를 실감 나게 담아낸 작품이다. 




아기에게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죽음을 물리치고 삶을 보호하는 방법을,

그 가장 강력한 지식을. 







[개벽]은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온 작품이다. '세상이 어지럽게 뒤집힘'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언어유희적으로 잘 표현했다. 태초에 외계인이 지구를 창조했다는 황당한 이론을 믿지는 않았으나 결국에는 사기당해 씁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윤 씨의 우여곡절이 비약적으로 그려진다. 

가부장적ㆍ유교적 가치관을 지닌 윤 씨가 은퇴 후에도 퍽퍽한 삶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비집고 들어온 터라 감정이입이 더 되었다.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께서 겪을 수 있는, 겪은 듯한, 흔한 사기 수법이었다. 윤 씨 또한 부인이 생전에 다단계 화장품 회사를 다닌다고 했을 때 반대했을 정도로 사리가 밝은 양반이었다는 점에서 확 와닿았다. 





보라월드 세계관을 다채롭게 접할 수 있는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3' <작은 종말>





아직 꺼내보지 못한 7편의 세계는 어떤 경이로움을 선사할지 기대된다. 짧은 이야기로도 이토록 밀착하게 만들 수 있다니! 색다르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가 지닌 힘을 경험하였다. 시선이 머무르는 공간에서 온몸으로 발산하는 그의 이야기에 자연스레 많은 이들의 귀와 눈이 쏠리는 일은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진다. 우리의 시간은 정보라를 만나기 전과 정보라를 만난 사건에 존재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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