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점심
장은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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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점심/ 장은진 소설집/ 한겨레출판




손가락으로 훑으면 결이 느껴질 듯한 표지가 안온한 일상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머무는 이가 떠났는지, 아직 오지 안 왔는지 모르지만 살며시 빛이 머무는 곳의 반짝임과 나무 그늘 아래 자리 잡은 두 사람의 편안한 흔적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고즈넉하게 만든다. 너와 나, 우리의 사랑이 담긴 적요한 소설 『가벼운 점심』이다. 




장은진 작가의 소설집 『가벼운 점심』은 여섯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랑과 고독 그리고 계절을 담은 문장들이 폐부를 찌르며 들어온다. '가볍게' 시작했는데 '무겁게' 삶을 훑는다. 하지만 그 시선이 결코 부담스럽거나 껄끄럽지 않고, '아~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인물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가게 된다. '다행이다' 숨을 내쉬고 힘껏 기지개를 켜며 자연스럽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게 하는 결말까지 감정을 흐트러지지 않게 잘 인도하는, 친절한 이야기들이다. 




"계절이 정해지면 인물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에 계절이 입혀지고, 가끔은 계절이 이야기의 전부가 되기도" 한다 말하는 장은진 작가의 말처럼 계절의 냄새와 기운이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맞춤'처럼 대체불가의 영향력으로 이야기를 내 안 깊숙한 곳에 닿게 하였다. 




계절감이 진하게 배어있는 소설은 <가벼운 점심>, <하품>, <나의 루마니아어 수업>, <파수꾼>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품은 이 소설들은 이제 봄기운이 만연해진 5월의 푸르른 하늘을 망각한채 계절의 한복판으로 끌어당겼다. 타인의 감성으로 1년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다가올 계절들에게 설렘을 느꼈다. 어떤 이야기들을 가져다줄 건가.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시간'과 '공간'에 묶여있다는 생각을 했다. <가벼운 점심>의 나는 '아버지가 가출한 10년의 시간'에, <피아노, 피아노>의 남자는 익숙해지지 않는 남성의 모습인 '서울'에, <하품>의 그는 지난날 추억 속 '아내'에, <고전적인 시간>의 그녀는 '권태와 고독'에, <나의 루마니아어 수업>의 나는 '가을을 닮은 눈동자'를 사랑해 '가을'에, <파수꾼>의 강 씨는 '철도 건널목'에 묶여 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그들이 어떻게 그 매듭을 풀고 시간이 다시 흐르게 하고, 고독과 고요 대신 사랑과 내일을 그리게 되는지 우리들에게 들려주느라 소란스럽다.








가슴을 툭 치고 간 이야기는 <가벼운 점심>이었다. 소설집 제목과도 같은 이 이야기는 자칫 무거운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봄의 기운이 듬뿍 담긴, 벚꽃처럼 미소를 띠고 인정하게 되는 문장력을 보여주고 있다. 갑자기 사라져서 10년 후 조부의 장례에 나타난 아버지의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불쾌감 없이 적당하게 그려내서 하나의 사건을 부부, 부모 자식, 개인 등 다채로운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구도를 잡은, 인상 깊은 소설이다.  




"이젠 좋아해서 좋아졌어요?

더 좋아졌지. 

봄이 왔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진짜 불행한 사람인 거야."





아버지의 불행을 감지했던 나는 죽지 않고 가출한 아버지를 이해하고 다시 돌아온 아버지를 자신의 결혼식에 초대할 정도로 친근함을 느낀다. 30대가 되고 결혼식을 앞둔 아들이 10년의 시간이 가져온 아버지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사랑'의 감정과 '봄'의 기운으로 충만하게 세심하게 담아내서 좋았다. '포기한 아버지'는 떠나보내고 '봄을 맞이한 아버지'와의 첫 헤어짐이 담담히 펼쳐진다. 




'한점' 사람의 외로움.

사람은 시작부터가 외롭구나. 그래야 만날 수 있어.




고양이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고양이는 인물들의 감정선과 행동에 영향을 주거나 드러낸다. 

<하품>의 그는 이름 '루미' 대신 '먼지'로 부르면서 아내가 선택한 공간인 헌책방에 대한 불쾌감을 투영한다. 아내의 사랑을 받는 고양이를 미워하며 서로 대치한다. 하지만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웃음 짓는 아내를 보며 고양이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변화가 흥미롭다. 

그가 사랑한 것은 진정 무엇일까? 

자신이 아내를 살리기 위해 자작곡에 가사를 쓰려 한 것처럼 아내를 위해 자작곡에 가사를 쓰려는 후배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여전히 아내를 위해 피아노를 치는 그 그리고 그의 연주를 듣는 고양이 먼지를 뒤로 한 채 끈적끈적한 여름은 지나가고 있다. 








<고전적인 시간>에서는 버려진 7년을 책임지고 집을 지킨 주인으로서 고양이 가족이 등장한다. 그녀는 기꺼이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과 가까워지고자 노력한다. 

여름은 고양이의 졸음을 닮았다_213




<나의 루마니아어 수업>에서는 대학 시절 사랑했던 덩어리가 되지 못하고 남은 사람처럼 등에 하트 문양이 있는 고양이를 챙긴다. 가을을 닮은 눈동자, 쓸쓸함을 감당하다 못해 동공이 녹아버린 눈동자를 지닌 그녀를 닮았다 생각한 고양이가 봄의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는 마지막 문장에 가슴이 아릿했다. 그리고 기뻤다. 살아있어서.



<파수꾼> 강 씨에게도 고양이가 달라붙는다. 소리가 사라졌다 들렸다 하는 그에게 고양이는 큰 도움이 된다. 철도 건널목 관리원인 그는 초소가 문을 닫게 되자 고양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친구가 없는 듯한 여자아이에게 고양이를 보낸다.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기뻐하는 강 씨를 보며 고양이가 다시 찾아오겠구나 생각했다. 




끝나는 곳에는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우리는 그 문으로 한 발짝만 내밀면 되는 거야.




고양이가 말하는 끝과 강 씨가 그리는 끝이 갈라진 후, 그들의 새로운 시작이 기대된다. 강 씨의 귀에 또렷이 들리는 '야옹' 소리가 희망의 불씨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외로운 '한 점'에서 시작되었을 한 사람이 살아오면서 반복되는 것 같은 계절이라도 사랑을 만나기도, 고독과 권태를 느끼기도 하면서 특별한 시간이 된다. 다시 오지 않을 지금의 계절들이 쌓여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겨레 하니포터8기 자격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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