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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103 ㅣ 소설Y
유이제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평점 :
터널 103/ 유이제 지음/ 창비/ 소설Y클럽
우리는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끔찍한 비극을 여러 곳에서 접한다. 현실에서, 역사에서, 여러 콘텐츠에서. 소설Y클럽 <터널 103> 또한 비극의 시작은 '인간의 탐욕'이었다. 계속 소재로 소비되며 수많은 이야기로 우리를 일깨우는 이 '탐욕'의 결과는 이 소설에서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괴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괴물을 상대로 살아남기 위한 여러 인물들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독자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크리처물인 소설 <터널 103>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무대가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유이제 작가의 노련미와 섬세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검은과부거미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처절하고도 치열한 사투는 어느새 다형과 승하의 호흡에 맞춰 같이 숨 쉬고 긴장하게 만든다.
'검은과부거미'를 영어로 '블랙위도우'라 한다. 익숙한 마블 어벤저스의 히어로 블랙위도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레드룸에서 혹독한 훈련과 교육으로 비밀병기, 암살자로 키워진 그의 과거가 <터널 103> 속 무피귀와 겹쳐지면서 상념에 잠기게 되었다.
갑자기 마을을 덮친 괴물 무피귀를 피해 해저터널로 들어간 사람들은 수십 년 후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에 봉착하고 큰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살기 위해 터널로 들어갔던 이들이 바닷물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터널 103>은 두렵지만 어릴 적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셨던 바깥세상에 대한 기대와 사랑하는 이들을 구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용기를 내어 홀로 터널 밖 세상으로 나아가는 소녀 '서다형'의 발걸음으로 확장되는 소설이다. 옹골차고 단단하며 따뜻한 다형이지만 이제 열여섯 살, 세상을 이해하고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으로 보여주기에는 미약한 존재이다. 하지만 터널 속 어른들은 이 힘겨운 짐을 기어이 그 아이의 어깨에 얹어주었다.
읽는 내내 그 아이에게 괜히 내가 부채의식을 느꼈다. 지도자, 어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무피귀에게서 다형을 구해준 '라승하'가 데려간 또 다른 생존자들의 마을을 둘러보면서 더욱더 뼈저리게 실감한다. 그 옛날에는 터널을 사이에 두고 생과 사가 갈라져 한쪽은 안도를, 다른 한쪽은 극한 공포를 경험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두 마을은 첨예하게 다른 모습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
터널 속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해 입구를 막아 괴물의 침입을 막은 황선태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어 당연하게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촌장을 맡고 있다. 대물림되는 자리는 권력이 되어버렸고, 현 촌장 황필규는 자기 입맛대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터널 속 사람들의 모습은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나중에 황선태가 치른 희생의 진실이 밝혀졌을 때는 경악스러웠지만, 촌장 황필규의 만행이 이해가 되었다.
지도자의 역량과 가치관이 마을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 지켜보면서 다형과 승하 곁에 좋은 어른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척박한 현실에서도 꿈꾸게 하고 그 꿈을 포기하지 않을 굳은 마음을 심어주었다.
"중요한 건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기회를 준다는 거야.
우리 약속하자. 무슨 일이 있어도
터널에서 벗어나는 꿈을 포기하지 말자고."
- 서다형과 할아버지 서주필의 대화
다형은 내륙 쪽 차폐문을 여는 무모하고 막중한 임무를 위해 세상으로 나와 '라승하'를 만났다. 터널 속과는 달리 단란하고 안정적인 마을 공동체와 위기 상황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이장과 경비대장도 만났다. 그리고 '싱아'와 '이준익' 대위와 다른 군인들도 만났다.
언더원-레비아탄-네피림, 극악무도한 진실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인간'에 대한 신의는 부서지고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 충격적인 전말 속에서도 이처럼 찬란한 이들이 존재하여 '폭신한 잔디밭에 누워 무피귀 걱정 없이 꾸벅꾸벅 졸 수 있는 날'을 염원할 수 있었다.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 감히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을 벌인 결과는 참으로 참혹했다. 다형이 '검은과부거미섬' 곳곳에서 만난 인연들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를 먹고자 달려드는 무피귀, 그를 사심 없이 구해주고 힘겨운 여정을 함께해 준 승하, 차폐문을 열 수 있는 핵심 정보를 주었지만 무피귀로 변한 아버지의 먹이로 내던진 태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험체로 차출되어 언더원이 되었지만 인간성을 지키며 살아온 군인들. 그 수많은 만남을 거쳐 함께 살아남고자 터널로 돌아간 다형은 좌절하지만, 싱아와 승하의 도움을 받아 차폐문을 열고야 만다.
"하하하"
검은 과거를 함께 닫은 다형과 승하의 웃음을 싣고 끝을 맺을 줄 알았건만, 유이제 작가는 끝까지 우리를 긴장시킨다.
그저 "나하고 똑같이 생겼어."를 반복하는 싱아가 지금처럼 해맑고 순수한 마음을 지키고 자랄 수 있기를 바라건만 다형과 승하의 은밀한 시선 끝에서 부풀기 시작하는 불안이 나를 건드리기 시작한다.
책을 펼치기 시작하자마자 무섭게 달려드는 무피귀를 피해 숨 가쁘게 애절하게 마지막 장까지 읽어 내려갔다. 눈에 맺힌 눈물과 가슴에 박힌 돌덩이가 무겁게 마지막 페이지를 붙잡고 있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이 불러일으킨 참극. 내륙 쪽 차폐문을 잠그고 떠나버린 군인들처럼 일을 벌이는 자들은 묻어버리거나 떠나버리는 게 쉽다. 그저 아무런 연유도 모른 채 일을 당하는 자들의 고통과 비명이, 일로 벌어진 결과를 해결하고자 하는 자들의 사투가 계속될 뿐이다. 이 어둡고 슬픈 예감이 부디 흩어지기를 꿈꾼다.
"우리는 살아남을 거야, 함께"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