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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 ㅣ 문학동네 청소년 68
문이소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평점 :
파란 앞표지에 그려진 소녀의 미소와 비눗방울이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고, 노란 뒤표지는 그 마음을 감싸 안아주는 듯하다. 바로 한낙원과학소설상 수상작 마지막 히치하이커의 문이소 작가의 첫 SF 소설집 『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 이다.
국가기밀서평단으로 작가님 긴급 미션과 함께 미리 도서를 만나볼 수 있었다. 총 5편이 방울들이 되어 이룬 작은 샘 같은 이 책은 나는 '혼자'라는 자각으로 불안하고 두려운 우리에게 어둠 너머 곁에서 손 내미는 또 다른 존재를 다정하게 그리고 있다. 나와 같은 생각일 지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기꺼이 손 내밀어 주고 어깨를 빌려주는 타인을 방울방울 보여주고 있다.
친한 친구일 수도, 오늘 처음 만난 이일 수도, 두려워하는 이일수도 있지만 어려움에 처한 존재를 돕기 위해 베푸는 친절이 이 책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역시 책표지처럼 따스하다. 파란색인데 신기하게도 온기를 품고 있다.
이 책의 매력은 다정한 온기뿐만 아니라 자꾸 피식거리게 되는 유머에 있다.
"유머는 존엄성의 선언이며,
인간에게 닥친 일들에 대한 인간 우월성의 확인이다."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중에서
"유머는 위대하고 은혜로운 것이다.
유머가 있으면
이내 우리의 모든 짜증과 분노가 사라지고
대신 명랑한 기운이 생겨난다."
마크 트웨인
유머는 우리가 가진 놀라운 무기이다. 『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 은 그 힘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읽으면서 자꾸 피식거리는 나를 힐끔힐끔 보는 아들 내미의 관심을 봐도 그렇다. 책 잘 읽던 아이가 게임과 유튜브의 세계를 접하고 나서는 시들해져서 여간 속상한 일이 아니었건만. 이 책을 읽으면서 웃는 내가 신기한지 물어봤다.
"엄마는 책이 재밌어요?"
"어, 이 책이 재밌네."
"무슨 책인데요?"
한번 읽어보라고 권했으니 다 읽은 후 얘기를 나눠보면 좋겠다. 오래간만에 책에 관심을 보인 아들이라 신기하고, 고마웠다.
SF 소설집답게 평행우주, 웜홀, AI, 임종 서비스, 로봇 등 다채로운 소재들이 등장하여 과학적 호기심과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오늘의 일상과 소설 속 미래 언젠가의 일상이 미묘하게 겹쳐있는 듯한 기시감에 빠져들게 된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우리 삶의 근본적인 가치를 뒤흔들어놓지 않을 거라는 작가의 바람이 기저에 깔려있는 이 소설집은 소소한 일상 속에 큰 질문과 문제를 잘 녹여내고 있다. 읽어나가는 우리는 작가가 뿌려놓은 유머를 걷어들이면서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을 찾아나가게 된다.
몇 년 새 뜨거워져 가는 지구에서 시작된 위기의식은 웜홀을 통해 버섯 종자를 가지러 온 평행우주의 먼 미래 공무원 웜홀 라이더의 입을 통해 현실화된다(소녀 농부 깡지와 웜홀 라이더와 첫사랑 각성자).
그림으로 세상에 인정받지 못했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가난한 일러스트레이터와 '나'를 인지한 순간에 대한 질문으로 번민하는 세계 최고의 지성인 AI가 서로를 이해하고 그림으로 소통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가난한 일러스트레이터의 통장 잔고 변화는 다이나믹하다(젤리의 경배).
어제의 나는 흘러가서 없고, 내일의 나는 아직 오지 않아 없는 단 하나의 시공뿐인 지구에 찾아온 스무 번째 나는 단절자이다. 존재의 흐름이 끊긴 내가 지구인과 다름없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하지만 '스무 번째 나'의 마지막 결심이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찬란하게 한다. 말과 글로 전할 수 없는 '유영의 촉감'을 나누며 사는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유영의 촉감).
"기억하는 한, 언제나 함께."
이토록 좋은 날 서비스는 죽은 이에게도, 이별을 고하는 이에게도 따스함을 선사한다. 작위적이다 반감이 들기도 하겠지만, 젤리의 경배에서 젤리가 한 말처럼 '나'가 흩어지는 마지막 순간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이루고 싶었던 꿈을 꾸면서 맞이할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해주고 싶은 마지막 배웅이다. 물론 어느 누군가에게는 몇 달의 생활비가 드는 고가일 수도 있다는 게 눈에 밟히지만(이토록 좋은 날, 오늘의 주인공은).
문이소 작가의 발랄한 유머는 소설 전반에 묻어나지만 제목이 특히 그렇다. 봉지 기사와 대걸레 마녀. 이 창의적인 캐릭터 설정으로 우리를 몰입시킨 작가는 의뭉스러운 공간을 연출하다가 햇살처럼 관심과 사랑이 넘치는 공간으로 이끈다. 우리 주변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작은 생명체의 죽음과 탄생에 대한 다정한 책임을 만날 수 있는 단편으로, 많은 이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생명을 지키고 보살피는 이들이 기사와 마녀 바로 도망친 토끼 로봇과 은둔형 예술가라는 설정이 와닿는다. 살아남는다. 지켜야 하는 이가 있는 절박함이 전하는 진심이 로봇을 감동시키고, 그렇게 태어난 작은 생명을 눈 감을 수 없는 다정한 누군가가 보살피게 되는, 작은 기적이 일어나는 이야기다. 그렇게 이웃이,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따뜻하고 웃음기 머금은 세상을 담고 있다(봉지 기사와 대걸레 마녀의 황홀한 우울경).
다섯 편의 단편을 읽고 다섯 번의 긴급 미션을 수행하면서 지난 추억을 끄집어내보고, 내 집도 둘러보면서 웃고 다정한 하루들을 보낼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새삼 '나'를 향한 세상의 소소한 다정을 깨달으며 미소를 지어본다. 위로받는 시간을 기대하며 『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 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