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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환담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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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기담이나 괴담을 즐기는 터라 이번에 출간된 윤채근 작가의 <고전환담>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다. 저자는 빈 공간이 많은 역사에 과감한 상상력을 더해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를 창출하고 있다. 배경이 된 역사적 사실을 알든, 모르든 우리는 무언가의 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세계 속 이야기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고전환담/ 윤채근 소설/ 문학동네
무엇을 보고 느끼게 될지 모르고 떠나는 여행, 그 설렘 가득한 길에 <고전환담>의 윤채근 저자는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고 자기만의 역사적 진실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하였다. <고전환담>의 환상과 사실이 뒤섞인 세계에서 역사 속 인물과 공명하는, 강렬하고도 놀라운 경험을 기대하며 책을 펼쳤다.
이 책은 주제를 달리하여 색과 결을 달리하는 이야기 모둠으로 구성되었다.
1.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현장을 무대로 삼아 창조된 유사 현실이 펼쳐지는 <전쟁과 혁명>
2. 판타지 스릴러 형식을 통해 공식 역사 속에서 충분히 소화되지 못한 사건들의 빈칸을 허구로 채워 넣은 <현장의 미스터리>
3.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들에 관한 서사를 재해석하여 기존 관점을 뒤집고자 한 <시간을 초월한 사랑>
역사적 사건에 관한 짤막한 글 형식으로 제법 많은 팩션을 만날 수 있다. 그중 강렬한 느낌을 선사하는 이야기들이 몇 편 된다. 이야기의 서막을 여는 <왜장 와키자카의 고백>을 위시하여 역사적 사실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새롭게 재창조하여 사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우리를 매혹시키는 작품들이다.
우리 국민이 좋아하는 위인을 뽑으라 하면 절대 빠지지 않는 '이순신' 장군이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이순신 장군과 와키자키 야스하루 사이의 인연을 역사적 상황에 바탕을 두고 쓰인 허구의 이야기는 강렬하다. 일본에 보관되어 있는 이순신의 육필 칠언시. 서명과 낙관까지 갖춘 이 필적에 숨겨진 진실을 찾고자 하는 호기심은 놀랍게도 그를 증오하면서도 존경한 왜장의 절절한 고백을 빌어 그려진다. 이순신 장군에게 증오와 분노, 좌절을 느끼면서도 경외를 넘어 추앙하는 왜장 와키자키의 고백으로 '이순신' 장군은 인간을 뛰어넘어 하늘이 내린 존재로 우뚝 서게 된다.
정여립의 기축옥사 이후 임진왜란 발발 정황을 배경으로 불온한 조선을 그려낸 <우리들의 위험한 이웃>또한 참신함을 넘은 과감한 행보였다. 기축옥사의 숨은 주역으로 알려진 미궁의 인물 '길삼봉'을 '허균'으로 설정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허균에 대해 단편적인 지식에 머물렀던 나로서는 놀라웠다. 허균과 광해군, 궁금증이 폭발하는 역사 메이트다. 짧은 이야기 하나가 일으키는 파장은 참으로 크다. 작가가 손에 쥔 정보로 짜 맞춘 새로운 판으로 역사적 호기심이 커지고 있으니 말이다. 진정 이야기의 힘일 테다.
"도적? 누가 도적이냐? 백성들 주린 배도 못 채워주는 임금이 진짜 도적 아니냐?
이 나라를 누가 세웠더라? 생각해 보거라.
이성계는 삼봉 선생이 만들어준 왕조에 그저 걸터앉았을 뿐이다.
임금은 백성이 필요할 때 만드는 거다.
왕은 아무나 돌아가며 하면 된다."
<고전 환담>은 참으로 다채로운 이야기의 장이다.
정조 시대에 강진에서 벌어진 김은애 사건을 혜경궁 홍씨의 처지와 연결 지어 풀어내고(살인자를 쫓는 밤), 고려의 빼어난 문장가 이규보가 시마(초원의 음유시인)과 계약했다는 설정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만 시인이 될 수 있다는 형이상적인 의견을 선보이기도(시마의 계약)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 땅에 남겨진 일본인의 후손을 기녀로 등장시켜 시인과의 인연을 노래하고(칼의 가족), 프랑스 통역관 모리스 쿠랑을 통해 강대국 앞에 놓인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의 위기를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어낸다.(모리스 쿠랑 이야기)
경주에서 발견된 보물 제635호 페르시아 왕실 보검을 고대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에 담긴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 이야기와 연결시켜 직조한 팩션 <불과 모래의 기억>부터 황진이의 마지막을 시작으로 황진이의 불꽃같은 인생을 담아낸 <여름 여자 가을에 떠나다>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들에 대한 서사 또한 아우르고 있다.
"이 세상은 본디 크나큰 이야기인 셈 아닌가요?
이 아우는 이야기가 덧없이 끝나버릴까 두려워 잠들지 못한답니다.
혹은 세상이 너무 재미 없어질까 불안하여 밤을 지키는 초병이 되었다라고나 할까요?"
이렇듯 <고전환담>은 이야기가 생명을 얻어 뻗어나가는 세계의 무궁무진한 힘이 담긴 소설이다. 역사와 문헌을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자연스레 품은 호기심과 의아심을 글로 직조하여 또 다른 질문과 상상을 낳고 있으니 말이다.
"말을 마음에만 품고 산다면 그게 지옥인 거다.
말로 못 할라치면 글로라도 써서 뜻을 전해야 할 것 아니겠느냐?
백성들이 갇혀 있는 무명의 지옥을 우리가 깨트릴 것이다."
"입으로 하지 않은 말은 잠꼬대 같아서 한을 남길 뿐이고
글로 쓰지 않은 말은 봄기운에 녹아버릴 고드름처럼 허무한 것이란다.
아버지께서 만드신 글자로 어미의 마지막 마음을 이렇게 너에게 건넨다."
윤채근 저자는 역사적 사실을 허구의 필터로 재조명하여 무심히 넘겼던 사건의 이면과 인물의 속내를 담아냈다. 익숙한 역사적 통념을 허를 찌르는 통찰력과 찬란한 상상력으로 무너뜨린다.
윤채근 저자는 팩션마다 <역사와 문헌>을 제시하여 상상의 씨를 뿌린 토양을 확실히 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상상을 구분하되 재구성되어 퍼져나가는 이야기의 힘을 음미하고 공감할 것이다.
그에게 역사는 기록 너머 행간과 맥락 그리고 공백까지도 놓치지 않고 면밀히 살피는 대상이자 어둠의 장막을 거둬 진실의 빛으로 밝히고픈 상대지 않을까. <고전환담>과 함께 한 시간은 그가 던진 역사적 진실에 관한 뜨거운 질문에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찾아가고자 하는 매혹적인 여정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