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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꿈 ㅣ 트리플 16
양선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2월
평점 :
우리나라 신진작가들을 만나볼 수 있는 핫한 통로인 트리플 시리즈 16번째 책『말과 꿈』
말과 꿈/ 양선형 소설/ 트리플16/ 자음과모음
이 책을 통해 양선형 작가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되었다. 한 작가를 새로이 알게 된다는 것은 두근두근 설레고 떨리는 일이다. 작가마다 지니고 있는 고유한 파장에 나를 맡기고 흡수될 수 있느냐 한걸음 한걸음 확인하면서 내딛는 시간은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다. 그 긴장감이 새로운 만남을 계속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양선형 작가는 몽환적인 세계로 나를 인도하였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내내 생경하면서도 감각화되어가는 신기한 경험을 하였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읽어나가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고자 하는 바를 단락에서, 문장에서, 단어에서 건져내고 싶었다.
'양선형'의 세계를 여는, 순한 맛의 단편인 <너구리 외교관>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누군가 알려준 오솔길을 향해 무의지적인 걸음으로 나아가는 나그네는 드디어 목적지 '산장'에 도착했다. 멀리서 등대처럼 불빛으로 인도하던 그곳이 그의 노크에 칠흑 같은 어둠으로 사그라져 가는 것을 목도하는 그 주위에 너구리들이 몰려들었다.
너구리와 피 흘리는 낯선 이 그리고 너구리를 돌보는 산장 관리인, 마치 삼각형처럼 마음이 흐르고 그들의 이야기가 끝이 난다. 마지막에 나오는 촛불의 의미는 낯선 이의 생명일까?
촛불이 희미해졌다. 테이블 위로 올라선 너구리 전령이 양손으로 촛불을 감쌌다. 포개진 손바닥 사이의 캄캄한 우물 속으로 황금빛 물고기가 헤엄쳤다. (너구리 외교관, 17)
표제작인 <말과 꿈>은 사건과 시간이 얽히고설켜있는 구조이다. 주인공 그는 예전 교통사고 당시 병원에서 만났다고 믿는, 그를 찾아왔다고 믿는 말이 활주로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무작정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향한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는 지난날 말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사라진 말의 일생을 들려준다. 시간의 흐름은 순차적이지 않아 독자의 집중을 유도한다. 사건 또한 '그와 말'뿐이 아니라 '택시 기사 할아버지와 딸' 이야기와 '그와 가족' 이야기가 추가되어 시선을 분산시킨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비자발적인 흐름을 기꺼이 중단시킬 수 있는 이들을 사랑했다. (말과 꿈, 24)
녀석의 이미지는 그의 기억 한가운데에 새겨진 공백의 모양에 들어맞는 마지막 퍼즐 조각, 그가 망각으로부터 돌려받은 아주 각별한 퍼즐 조각이 되었다. (말과 꿈, 27)
약속, 죽음, 뱀, 복숭아, 공항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듯한 존재들이 카테고리 안에서 비슷한 소재들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엮어내고 있다. 택시 기사 할아버지의 말처럼 딸에 대한 이야기가 말을 찾아 떠나는 그에게 도움이 되는지 고민하게 된다. 딸과 비슷한 용모의 누군가를 보고 딸의 생존을 간절히 믿는 기사 할아버지의 자책 어린 고백이 약속 아닌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기꺼이 나선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죽음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는 꿈과 환영 그리고 이를 쫓는 듯하면서도 억누르는 듯한 모습들을 소설 전반에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소설인지 에세인지 헷갈린 소설이었다. 100% 허구의 인물, 사건이 없겠지만, 이는 진짜 같았다. 그런데 작가는 소설이라 칭했다. 친구의 진짜 모습과 상상이 버무려져 나온 결과물, '퇴거'는 지독히도 날것이었다. 그래서 양선형 작가와 양선형 글쓰기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음을 잘 간수해야 돼. 결국 자신을 아낄 사람은 자신밖에 없어지잖아. (2018:「퇴거」, 126)
타인에 관해 말하는 일은 타인에 대한 고질적인 착각에 대해 말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친구가 겪은 사연에 관해 쓰는 일은 나의 무지를 근사하게 봉합해 친구를 어떤 선형적인 가이드라인 속의 전형으로 박제하는 일과 얼마나 다를까. (2024:「퇴거」에 관한 소설, 202)
양선형 작가가 소개해 주는 아름다운 글들을 만날 수 있다. 「말과 꿈」 소설 플롯을 고민하는 이야기에서 그가 추구하는 글쓰기 세계관을 피력한다. 이 에세이와 윤아랑 문학평론가 해설을 참조하여 양선형 작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낯설다. 하지만 시도하고 꿈꾸는 작가의 의지를 존중한다. 찰나의 마음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기록하고 공유하여 공감하고자 하는 양선형 작가의 결의에 감복하였다.
소설은 … 반영과 환상으로 분열되는 이중의 레이어를 갖게 된다. 반영은 그것의 불가능성을 통해 과거의 상실을, 환상은 그것의 불가능성을 통해 미래의 상실을 드러낸다. 반영은 실패할 것이며 환상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환영은 반영과 환상이 중첩된 채로 뒤섞이는 맞물리는 틈새에서 탄생한다. (「말과 꿈」에 관한 소설, 235)
결말과 목적지가 중요한 게 아닌 찰나를, 과거와 미래의 틈새를 투영하는 색다른 소설집이다. 고심 가득한 우직한 친절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하는 양선형의 소설 쓰기는 읽고 또 읽기를, 필사하고 또 필사하기를 유도한다. 이제 봄기운이 느껴지는 날씨이다. 지인에게 움츠렸던 몸의 기지개를 재촉하듯 선물하기 좋은 책이다. 필사하기 좋은 책이라 서로 필사한 대목을 공유하며 따뜻한 봄볕을 쐬기에도 딱일 듯하다. 선형적인 글은 어두운 곳보다는 밝은 곳에서 더 또렷해질 것만 같아서.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