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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키드의 생애 - 테이프는 사라져도 좋아하는 마음은 어디 갈 줄을 모르고
정율리 지음 / 카멜북스 / 202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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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프는 사라져도
좋아하는 마음은
어디 갈 줄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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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에 마음이 흔들렸다. 어린 시절 비디오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선사해 주는 친구였다. 하교 후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 비디오를 빌려 따뜻한 방에서 감상한 후, 해 질 무렵 우리끼리 준비한 밥상에 둘러앉거나 친구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상에 숟가락을 얹었었다. 나에게 비디오는 영화 자체의 감흥만이 아니라 함께 한 이들의 숨을 기록한 선물이었다.
이렇게도 좋았던, 소중했던 비디오를 잊고 지내온 나에게 [비디오 키드의 생애]라는 책이 찾아왔다. 흡사 내 이야기가 할 정도로 빠져들어 읽었다. 지금은 모든 게 넘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라 '영화'의 비중이 낮아지고 있는 듯해서 서운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낯선 세계에 발을 내딛는 설렘 가득했던 그 시절을 소환할 수 있어 행복했다.
비슷한 연배라 그런지 비디오 플레이리스트가 겹쳐 공감 포인트가 많았다. 같은 비디오를 봤지만 언제, 누구와, 어디서 보았는지가 작용하는 힘이 큰지라 정율리 작가가 비디오마다 소환하는 친구와 추억 이야기들은 색다른 맛을 선사하였다. K, Y, H, E … 이니셜로 불리는 친구들,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이도 있지만 이제는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과 키워온 감성과 넓혀온 가치는 정율리 작가 인생의 나이테를 굵어지게 만들어주었다.
'비디오'라는 문을 통해 사회를 익히고 받아들인 정율리 작가의 서사는 이야기가 가지는 역동적이고 파급력 강한 힘을 보여주었다. '책'으로만이 아니라 '비디오'로도 우리는 이야기가 전하는 울림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비춰보고 생각에 잠기고 깨달음을, 감사함을, 행복을, 즐거움을 얻는다.
▶▶▶ 여러 해를 살며 행복이란 결국 찰나의 순간이자 그 순간 속의 자극임을 알게 됐다. 우리가 행복에 대해 무수히 떠드는 것에 비해 좀처럼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소리 없이 찾아왔다가 삶을 반추하는 와중에야 그 시절이 행복이었음을 깨닫기 때문이 아닐까. 몇 시, 몇 분, 몇 초에 등장할지 정확히 파악한 행복 앞에 우리는 자연스러운 삶을 누릴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내 인생만큼은 처음 마주하는 신작 영화처럼 매번 낯선 장면이면 좋겠다. _마법의 황금티켓 중
인생의 묘미들을 담은 영화 이야기들도 인상적이지만, 기억에 남는 편들이 있다. <늙지 않는 사람> 속 배우 장국영 이야기와 <캡틴! 우리를 구해주세요> &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행운> 속 선생님 이야기 그리고 <언니들, 나 기억하죠?> 속 배우 이나영 이야기다.
중학 시절 우리를 매혹시킨 존재는 홍콩배우들, 특히 장국영과 4대 천황이었다. 장국영을 추억하는 글은 자그마한 브라운관 TV 속에서 빨간 여자 옷을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두지를 내 머릿속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의 뺨을 타고 흘렀던 눈물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으니 그는 불멸이다.
카르페디엠. 캘리그래피 쓸 때나 여러 공예 작업 시 0순위로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격언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캡틴 키팅을 현실에서는 만나지 못한 목마름을 그가 일깨워주고자 했던 가치와 신념을 잊지 않고자 되새김으로써 해소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배우 이나영은 <아는 여자>와 <네 멋대로 해라> 이 두 작품만으로 내 심장을 가져가버렸다. 취향이 비슷하다. 좋아하는 게 같다는 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와르르 부숴버린다. 괜스레 정율리 작가가 아는 사람처럼 친근해졌다.
비디오를 통해 몰랐거나 금지되었던 세계를 알아간다는 은밀한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사랑의 다채로운 면을 만나기도 하고, 영화 속 배역을 흠모하다 배우를 추앙하게 되기도 하는 비디오 키드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옛날에는 화면에 새겨진 'The End'가 끝인 줄 알았지만, 지금은 아니라 생각한다. 계속되는 이야기로 어느 날 불현듯 다시 찾아오는 이야기들이 있어 옛날의 나와 오늘의 나 그리고 더 훗날의 나를 그 안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정율리 작가가 보내는 초대장
[비디오 키드의 생애]로 자신의 인생을 채웠던, 채운 무언가를 꺼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인생에서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 외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선사해 줄 것이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