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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필요한 시간 - 다시 시작하려는 이에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1월
평점 :
단정하게 묶은 머리, 반듯하게 편 허리, 오롯이 손에 든 책에 꽂힌 시선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평온한 시공간. 정여울 작가의 산문집 문학이 필요한 시간을 만나다.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정여울 산문/ 한겨레출판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에 오직 작은 부분만을 살아낼 수 있다면, 그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_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에서
정여울 작가는 이 문장이 던지는 화두가 '문학이 왜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아름다운 대답처럼 들린다고 했다. 문학을 통한 다채로운 상상과 감정이입을 통해 '나만의 편협한 삶'에 갇혀 있는 자신을 구원해 준다고. 그래서 문학이 너무 멀고, 거창하고, 심오하고, 다가가기 힘든 그 무엇으로 느껴지는 우리와 문학 사이의 가교 역할을 기꺼이 해내고 있다.
정여울 작가가 우리 손을 잡아서 이끌어준 문학은 시리도록 아름답고 무참히 슬프면서도 삶의 면면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비춰주었다. 주인공이 아니어도 마음이 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여유와 섬세한 감각은 문학을 좀 더 친숙하게 느끼고자 하는 이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듯하다.
문학을 사모하는 마음이 담긴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그 무게에 압도되어 어느새 공명하게 된다. 문학을 통해 인생을 명징하게 톺아보는 일은 이야기의 힘을 오롯이 누리는 시간이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이 뿜어내는 다채로운 삶의 빛깔로 둘러싸여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감사하면서 위안을 얻었다. 나 개인의 감정과 고통을 넘어 수많은 문학 작품 속 처절하고 치열한 실체를 갖춘 그것을 만나고 나면 개인의 현재를 마주 볼 수 있음을 정여울 작가는 진심 어린 문장으로 전한다.
주제별로 심혈을 기울여 선정했을 작품들 목록을 살펴보면서 언제 다 읽지 싶어 난감하면서도 행복하다. 이미 읽은 책들도 정여울 작가의 정제된 글로 만나니 모르는 책처럼 새로웠다. 그래서 궁금해지고 호기심이 인다.
모모가 자기 삶이라는 소중한 장작을 태워 피워올리는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을 이 책을 통해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그 따사로움으로 크로노스의 시간에 저당잡힌 오늘을 풀어줄 수 있는 여유를 찾았다. 노란 표지의 모모 책을 펼쳐들고 모모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오랜만이야."
일상 속 '문학적인 순간'을 가슴 뭉클한 일화로 전하고 있다. 정여울 작가의 멘토이신 문학평론가 고 황광수 선생은 힘겨운 투병 끝에 건강을 회복하여 시인 김정환 선생을 오랜만에 만났다고 한다. 김 선생은 70대의 황 선생에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프랑스어판으로 선물하셨다. "난 불어도 못하는데 왜 이걸 주는 거야?" "그러니까 오래오래 살아달라고." 김 선생의 마음에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문학을 향한 끝없는 사랑으로 맺어진 이 끈끈한 우정, 끝까지 눈부신 문장으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과 놀라움 그리고 기쁨의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는 그 마음에 그저 감명받을 수밖에 없었다.
달빛이 너무 탐나
물을 길러 갔다가 달도 함께 담았네.
돌아와서야 응당 깨달았네.
물을 비우면 달빛도 사라진다는 것을.
_ 이규보 <영정중월>
우리는 '상황'을 뛰어넘어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난 이규보의 한시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야생사과> 속 공간에서 한줄기 빛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상황의 마법에 걸려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오랜 습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함을 정여울 작가는 적확한 작품과 문장으로 펼쳐 보인다.
문학을 통해 우리가 얻고 누릴 수 있는 수많은 가치와 깨달음은 <문학이 필요한 시간>으로 회귀한다.
부끄러움의 소중함과 조용한 배려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 자비를 가르쳐준 존재와 자비를 배운 존재의 완벽한 하모니로 거대한 사랑을 실현한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논제로섬 게임을 SF 공간을 배경으로 그려낸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들은 인간답게 더 나아가 더 나은 존재로 성장시켜준다.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사소 바다>,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처럼 다시 쓰기로 원작이 가진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글로 재탄생하는 이야기의 멈추지 않는 생명력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연대와 공감이 있는 문학은 더할 나위 소중하다.
문학을 통해 우리의 상처를 치유받고, 잠재력을 찾아보고, 단련하고 성장하며, 위로받고 꿈꿀 수 있음을 정여울 작가는 섬세하고 다정한 문체로 속삭인다. 문학을 저어하는 이들에게 문학이 밝혀주는 길의 찬란함을 나누어주는 가교로서 움츠렸던 날개를 펴 힘찬 날갯짓을 시작하기를 응원하고 있다. <문학이 필요한 시간>, 한층 더 충만한 삶을 열어주었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5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