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부수는 말 - 왜곡되고 둔갑되는 권력의 언어를 해체하기
이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바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의 무게를 실감하게 되었다. 적확한 의미를 담아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어른에 국한되는 부분은 아니겠지만, 나는 비로소 나이를 먹으면서 본질과는 다르게 왜곡되는 '말'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말을 부수는 말』 책을 통해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둔갑되는 언어를 들여다보고 해체하는 일련의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고 무서웠다. 쉽게 흔들리고 쉽게 눈과 귀를 닫아버린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이기도 했다.



말을 부수는 말/이라영 지음/한겨레출판

 


고통 - 노동 - 시간 - 나이 듦 - 색깔 - 억울함 - 망언 - 증언 - 광주/여성/증언 - 세대 - 인권 - 퀴어 - 혐오 - 여성 - 여성 노동자 - 피해 - 동물 - 몸 - 지방 - 권력 - 아름다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말들은 묵은 때를 벗고 이라영 작가의 손을 거쳐 순수한 언어의 의미를 되찾았다. 그 의미를 이어나가고 지켜나가할 역할은 독자인 우리의 몫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투영된 나의 자화상은 권력의 편보다는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 편 가까운 곳에 서 있다. 그렇기에 작가의 시선에 통감하고 말을 부수는 지난한 작업을 응원하게 된다. 예전에는 불편하지만 무심코 흘렸던 '말'을 여기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작가를 따라 살펴보니 외면했던 영겁의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인 왜곡과 기만이 넘치다 못해 썩어 고여있었다.

 

 

읽으면서 콕콕 찌르는 문장들이 있다.

<고통> 청자가 있는 고통은 조명 받는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고통이야말로 진정한 고통이 아닐까.

고통을 말하는 일은 그 자체로 운동이다. 이 표현처럼 포기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고, 증언하고, 기록한 이들의 나날들이 과거부터 계속되어 왔다. 고통의 연대를 통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고통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고통이, 내 주변의 고통이 아니면 외면하거나 무시해버리기 쉽다. 주변의 고통에 좀 더 마음과 귀를 열어야겠다는 반성이 들었다.

 

 

<색깔> 비슷하게 생긴, 닮은 얼굴이라 더 가깝게 느끼면서 동시에 닮은 얼굴이라 더 쉽게 착취한다.

인종차별과 이주노동자에 대한 내용들을 읽으면서 주위를 떠올려 보았다. 이제는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서 외국인과 쉽게 만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지인으로 엮인 그들과 같은 나라 사람들이지만 다른 공간에서 접하는 이들에게 차별 없이 친절하게 대했나? 잠시 생각해 본다. 아는 언니가 올해 이사를 가면서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몽골인이라며 불편해했던 기억이 책 속 문장과 오버랩되면서 감정이 복잡해졌다.

 

 

<억울함> 자기 연민에 휩싸인 자와 투쟁하는 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갈린다는 사실을.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불교 경전 <보왕삼매론>

저자로서는 <보왕삼매론>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스님의 법문을 통해 이 '억울함'에 대해 비로소 이해했다고 한다.

"인간관계에서 숱하게 일어나는 억울함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다 밝혀지기 때문이다. …… 단 적극적으로 억울함을 밝혀야 할 때가 있다. 내 억울함을 밝히지 않아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은 억울함을 당할 일이 생긴다면 이때는 적극적으로 밝혀야 한다. 이를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억울한 일을 겪도록 돕는 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인의 고통과 억울함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투쟁하는 이들은 '나'와 '우리' 그리고 '죽은 자'의 억울함을 연대한다. '다시는' 혹은 '더는' 이 간절한 언어는 개인의 억울함 해소를 넘어 공적 사안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임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권력은 이런 억울함 마저 오역한다. 특권층의 억울함을 '공정'으로,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의 억울함을 '무능력'으로 뒤바꾼다. 저자는 '다시는'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오역된 억울함의 실체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대> 한국인들이 특권의 불평등에 분노하는 게 아니라 "특권에 접근할 기회의 불평등에 분노"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한국의 능력주의, 박권일 2021)

MZ 세대, X세대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을 인지하게 된 꼭지였다. 세대 구분에 대한 기준도 모호하고, 사용하는 나조차도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묵과했던 부분들을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했다. '공정 세대'라는 개념은 특정 계층의 억울함을 특정 세대의 분노로 둔갑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충분히 수긍되었다.

 

 

<권력>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직무와 무관한 능력까지 검증받으며 억울한 상황에 처하는 노동자들이 있는 반면, 알아야 하는 사람들은 당당하게 모르거나 몰라도 된다 우긴다.

2016 트럼프의 당선, 2022년 윤석열의 당선이 시사하는 바를 관통하는 꼭지로 권력의 언어에 대해 가장 빠르고 가장 쉽고 가장 뼈 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은 생각 없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상대방에게는 큰 상처가 되거나 반대의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의도하지 않고 던진 '말'도 찔리면 아프다. 그렇다면 거대한 칼이 되어 우리 사회 곳곳을 향해 거침없이 휘둘러진, 작정하고 왜곡된 권력의 언어가 만든 상처는 어떨까. 뼈아픈 상처를 입는 이들은 사회적 약자이고 소수자라고 안심하고 있는가. 권력층에게는 우리가 그들이고 그들이 우리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쓰는 게 아니라, 화두를 던지기 위해 쓴다. 권력의 말을 부수는 저항의 말이 더 많이 울리길 원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고통을 통해 우리 몸속에 들어온다"는 시몬 베유의 말을 늘 되새긴다. 고통을 통과한 언어가 아름다움을 운반하기를, 그 아름다움이 기울러진 정의의 저울을 균형 있게 바꿔놓기를. 이 세계의 모든 고통받는 타자들이 관계의 대칭에 의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의 주체가 될 수 있기를.

 


고통에서 아름다움까지

 

권력의 고리는 탄탄하지 못하지만 이리저리 엮여있어서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그래서 권력을 뒷받침하는 왜곡된 언어를 부수는 저항의 연대는 더 끈끈해져야 한다.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느껴져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어져도 저항의 목소리를 이어져야 한다는 작가의 결연한 의지를 읽었다. 우리 한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봅시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4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