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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가 제철 ㅣ 트리플 14
안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평점 :
트리플 시리즈 14번째 이야기 『방어가 제철』을 만났다.
'작가 - 작품 - 독자'의 아름다운 트리플을 향한 멈추지 않는 도전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3편의 단편과 1편의 에세이로 얇지만 단단한 구성으로 독자를 찾는 트리플 시리즈.
이번에는 '안윤' 작가의 『방어가 제철』로 [달밤 - 방어가 제철 - 만화경 - 없는 것들이 있는 자리]를 만날 수 있다. '20장 정도의 짧은 글로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는 이는 참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고 나서 굳이 장수를 세어보았다. 분명 술술 읽히는데도 강한 여운을 남기며 곱씹게 만들어 다시금 펼치게 만드는 글이었다. 그래서 세어보았다. 12장, 20장, 20장.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안윤' 작가에게, 작가 소개에 옆모습만 남긴 그에게 시기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방어가 제철/안윤/자음과모음
'상실'을 경험한 이들이 세 편 모두 등장한다. 상실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일 수도 있고, 관계의 끝일 수도 있다.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된 [달밤]과 [방어가 제철]은 지인과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3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 [만화경]은 '이혼'으로 인한 상실이 타인의 죽음과 연결되고 있다.
'나'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점차 애도의 대상이 확대된다.
'나'가 사회에 나와 관계를 맺고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 언니의 죽음(달밤)에서
'나'는 선택할 수 없었지만 삶의 소중한 부분인 가족인 오빠와 엄마의 죽음(방어가 제철)으로 이어지고,
이혼 후 이사한 집에 살았던 바로 전 입주민이 죽었다는 사실(만화경)을 알게 됨으로써
상실의 아픔은 분명해지고, 애도의 대상은 보편화된다고 생각한다.
[만화경] 속 등장인물 '나경'이 '이미리내'라는 타인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애도는 시작되었다.
상실을 경험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 상실을 수용하기까지 유예의 시간을 두었다. [달밤]에서는 1년 후의 시간을 그리고 있고, [방어가 제철]에서는 14년 후의 시간이 펼쳐진다. [만화경] 또한 이사 오기 전에는 알지 못한 사실이었으니 유예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각자에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적당한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마주 볼 수 있어야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어가 제철] 소설집 등장인물들은 어둠을 뚫고 빛을 마주할 수 있는 치유의 시간을 잘 보낸 듯하다. 눈부셨다.
'애도'를 하는 방식은 다 다를 테다. 죽음이 삶과 분리되지 않은 연장선상에서 존재한다고 본다면, 죽은 이를 보내고 다시금 살아있는 이들이 일어서야 한다고 본다면, 이 소설에서처럼 '음식'과 '식사'를 통해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방법이 좋을 듯하다.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자리로 죽은 이를 추억하고, 살아있는 이에게는 힘을 나눠줄 수 있으니 말이다.
[달밤]
좋아하는 동생의 생일상 육개장이 떠난 이의 제사상에 올려지는 시간의 단차는 주인공 '나'에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힘이 되어줄 것이다.
아프지 마. 안 아픈 게 최고야. 안 아픈 게 돈 버는 거야. _달밤 中 14쪽
그 애가 살아온 내력이 보이더라고요.
노동에 숙련된 몸, 어떤 환경에든 자신을 기꺼이 끼워 맞출 줄 아는
마음 같은 거요.
그건 네가 그런 사람이라서 보이는 거야.
아마 언니는 그렇게 말하려나요. _달밤 中 21쪽
좋아하고 사랑했던 언니가 떠난 후 언니가 본인에게 했던 말을, 소애에게 똑같이 하는 것처럼 마음이 이어졌다. 스스로 없기를 원한 언니를 무참히 떠나보낸 '나'는 살아있기에 살아갈 것이고, 언니와 그랬던 것처럼 소애와 마음을 나누며 살아갈 것이다.
너무 쉬워요. 버리고 버려지는 게요. _달밤 中 22쪽
말이 별로 없다는 소애가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에게 했던 말이다. 버려지는 음식에 대한 상념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꿈꾸지만 고단한 삶에 대한 푸념을 내비친다. 소애도, 나도 꿈꾸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도움 되지 않는 응원만 전할 수밖에 없어 무력하다.
축하해, 전소애. 태어난 거, 살아온 거, 살아 있는 거, 다. _달밤 中 26쪽
삶의 고단함과 무게 그리고 사랑이 느껴졌다. 소애의 '버리고 버려진다'라는 말을 포근하게 덮어줄 수 있는 응답처럼 들려와서 좋았던 구절이다. 우리는 이렇게 매 순간 축하할 일이 넘치고 축하받아야 할 일이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
[방어가 제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긋나기 시작한 밤, '어디서부터'가 되기 가장 알맞은 밤에 있던 4명 중 이제 2명만이 남았다. 오빠를 떠나보내고 잊어왔던, 아니 잊지 못했던 그에게 엄마를 떠나보내는 장례식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살아있는 '나'와 '정오'가 만났다. 그리고 계절마다 만나 맛있는 제철 음식들을 3년 동안 먹었다. 나는 그 3년의 시간 동안 먼저 떠난 오빠를 애도하고자 했던 마음만큼 그리웠던 '나의 정오'를 떠나보내는 준비를 했다.
그가 툭, 하고 무언가를 내려놓거나 구길 때마다
나는 날카로운 것에 할퀴인 상처를 마주하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_방어가 제철 中 42쪽
아무도 잘못한 이들이 없는 듯한데 꼬여버린 삶이었다. '세상사 맘대로 되는 거 하나 없는데 반찬이라도 맘껏 고르면 좋지 않냐'라며 반찬가게를 했다는 엄마의 말을 나는 뒤늦게 이모한테 전해 들었다. 아이고, 불쌍해서 어떡해, 불쌍해서.
마음대로 되지 않은 세상사라 원망했던 삶이었건만 어느새 엄마의 반찬가게를 물려받아 이모들과 운영하면서 정오에게 순탄한 삶이라고 말하는 나를 보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꿈이란 과연 무엇일까?
오빠의 죽음 이후 자신을 벌주듯 살아온 나는 정오 또한 고통받기를 바라면서도 잘 살아주기를 바랐다. 정오 또한 그런 마음이었으리라. 나와 정오의 끝맺음으로 나는 추억하는 순간을 오롯이 그리워할 수 있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지만 눈부신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진심인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만화경]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질문에 답을 넌지시 건네는 단편이었다.
이혼 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경에게 정신과 의사는 "일상을 뒤흔드는 큰 불행이나 걱정거리가 없는 상태, 조금은 단조롭게 느껴지는 날들이 행복에 더 가까워요."라고 말한다.
이혼 후 관심이 싫었던 나경이 연락하는 친구가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 수진이었다. 나경과 수진의 상황은 대비되지만, 정답은 없다. 아니 각자가 짊어지는 삶의 무게와 형태가 다를 뿐이다. 나경은 가볍든 무겁든 자기 살기 바쁜 요즘, 자신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집주인 숙분 할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의 이유를 알게 되면서 그리고 새로 이사 온 숙분의 지인 단심 할머니를 만나게 되면서 나경도 차츰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주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런 분은 진짜 처음 봐. 진짜 그렇다. 우리는 다 다른 존재들이다. 비슷할 수는 있지만 똑같을 수는 없다. 처음 겪어본 사람처럼 느껴지는 기분은 진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관심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알게 된 후 알기 전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나경은 이제 행복의 문을 열었다. 서른세 개의 야광별이 뜬 베란다에서 행복을 채워나갈 일이 기대된다.
'안윤' 작가의 『방어가 제철』은 감각적인 소설집이다. 미각, 청각, 시각, 촉각 등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장치들을 곳곳에 잘 배치하였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와 등장인물의 감정이 깊숙이 파고든다.
단편마다 '음식'이 중요한 매체가 되어서 등장한다. 음식에 대한 묘사는 온기와 사랑 그리고 관심을 우리에게 불러일으켰다.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마음이 투영된 음식이 고스란히 흡수되어 소화되었다. 또한 계절의 변화와 반짝이는 별, 모양이 바뀌는 달 그리고 파도가 치는 바다에 대한 시청각적인 묘사가 배경처럼 스며들었다.
떠난 존재들을 추억하며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하루를 진심을 다해 살아가는 그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 곁에 그들의 안부를 걱정하는 이들이 함께 해서 다행이고 고마웠다. 그들의, 우리 모두의 안온한 하루를 기대해 본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