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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정세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2년 9월
평점 :
허를 찌르는 작품
사회의 숨겨진 이면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충격적인 전개가 매력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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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정세진 소설집/고즈넉이엔티
정세진 작가의 소설집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에는 총 7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다.
표제작인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를 필두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현실에 뿌리를 두었지만 작가의 비범한 상상력으로 상식을 깨부수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여우에게 홀린 듯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정의인가? 불의인가? 옳고 그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회색 지대 같은 세계가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판단 내리기 어렵다. 작가가 던진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꼼짝없이 매료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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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에서 나는 자신의 범죄를 허무맹랑한 억설로 아무 일이 아니라고 포장한다. 높은 담장 안 요새같이 감춰진 저택 안에 숨겨져 있는 치명적인 비밀을 듣고 싶은 욕망이 먼저인지, 돈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아홉 살 아이를 유괴하고 아무도 모르는 끔찍한 방법으로 유기하고, 이를 빌미로 부모에게 돈과 그만큼의 가치를 지닌 비밀을 털어놓게 하는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한다.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행복한 결말이라 다행이란다. 유괴범인 '나'의 궤변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불쾌해졌지만, 이 이야기의 씁쓸한 뒷맛은 높은 담장 안에 자리 잡은 한 가정의 이중적이고 추악한 진실과 부부가 털어놓는 비밀에 그 정도는 약하다 도발하는 '나'로 대변되는 부정과 불의를 묵인하고 외면하는 사회이다.
"여보…… 우리 다 잘 될 거야." (p.34)
타임 루프를 다루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주인공을 그려내면서 희망을 전한다. 하지만 2. [인터뷰]는 그 공식을 깨고, 반복되는 삶을 빈틈없는 일정 대로 살아가며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인생을, 개인적으로는 허무한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인물을 보여주고 있다. 3만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내면서 겪었을 환희와 열정 그리고 회한과 고뇌는 어느새 사라지고, 껍데기 같은 삶을 보내는 강 대표의 공허한 눈빛을 상상하며 읽어내려갔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의 무게를 감사히 여기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어쩌면 운이 좋아 우연처럼]는 마냥 좋을 것만 같은 행운을 소재로 풀어내는 이야기가 이리도 우울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행운을 저어하던 주인공이 어쩌면 운이 좋아 우연처럼 만나기를 바라는 마지막이 인상적이었다.
6. [나를 버릴지라도]는 기도를 실현해 주는 이가 종교인들이 아닌 하청업체라는 황당무계한 설정이다. 폭력을 싫어하지만 정의로운 인물인 동철이가 입사 면접 차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되어 섬으로 끌려가 노예로 살아가는 어린 소녀들을 구해내는 이야기이다.
법의 사각지대, 인권이 사라진 지옥 같은 공간을 그려내고 있는 작가의 펜은 자신들의 편의와 안위를 위해 눈을 감아버린 경찰과 섬마을 주민들을 꿰뚫어 보고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았다고 항의하던 동철이가 안정적인 일자리가 생겼다고 기뻐하는 현실적인 그림에 작가에게 통쾌한 한방을 먹은 것 같았다.
"어쩌면 너는 스스로 벗어날 힘이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쟤들은 누가 봐도 도와줄 사람이 없잖아. 기적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p.209)
7.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지만 나의 시간은 멈췄다]로 마무리되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허무하고 공허한 이야기로 헛헛한 느낌으로 끝나지 않고, 훈훈한 이야기로 온몸에 흐르는 피가 잘 돌아 따뜻한 느낌에 절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거꾸로 가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과는 달리 삶의 빈 곳이 충족된 찰나에 멈추길 바라는 주인공의 소망이 기적처럼 이루어지길 바란다. 무엇이든 가능한 이 안에서는 이루어지리라.
"미안해……." (p.243)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 모두 근사한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언제든지 기꺼이 시간을 내어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