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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게, 큐레이터 - 뮤지엄에서 마주한 고요와 아우성의 시간들 ㅣ 일하는 사람 8
남애리 지음 / 문학수첩 / 202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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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했다.
나는 이 직업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 프롤로그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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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지방에서 올라와 경기도에 자리 잡은 후 쭉 살고 있다. 수도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경제적 부분도 있겠지만 교육·문화 전반적인 인프라를 포기할 수 없어서이다. 저자도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우리나라의 사회·경제·교육 자원들은 수도권에 특히,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자차가 없더라도 거미줄처럼 잘 짜인 지하철을 이용하면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으니 지방으로 내려가는 건 쉽지 않다. 공기가 좋지 않다, 교통이 불편하다, 온갖 불평불만을 늘여놓으면서도 일상의 혜택을 포기하기에는 욕심이 많은 나이다. 이런 나와는 다르게 시골에 있는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를 시작한 이의 이야기를 만났다.
<소소하게, 큐레이터>는 큐레이터로 10여 년의 시간을 보낸 저자가 그간의 일과 감정, 생각을 엮은 책이다. 부제 '뮤지엄에서 마주한 고요와 아우성의 시간들'의 의미를 잘 담고 있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706/pimg_7258792673473700.jpg)
소소하게, 큐레이터/남애리/문학수첩/일하는사람 08
코로나19 전에는 아이들과 1년에 3,4번은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고, 경기도미술관 전시와 수업에도 종종 참여했다. 그곳에서 만나는 도슨트, 학예사는 특별한 느낌이었다. 순수하게 작품을 감상하고 교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모든 작품이, 모든 전시가 그런 감정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 안에 담긴 스토리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알아가기에는 시간도 방법도 마땅치 않기에 도슨트나 전시자료집 도움을 받는다. 도슨트의 설명이 덧입혀진 작품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남의 나라로 유출되었다가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와 수리되어서 처음으로 전시되는 작품이라는 설명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벅차오르는 무언가를 이끌어내었다. 전시장을 채운 수많은 작품들 중 하나가 아니라 특별하게 다가와 시간을 들여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나에게 큐레이터는 작품과 연결해 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소소하게, 큐레이터>는 이런 나에게 큐레이터 세계를 확장시켜준 책이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바쁨을 피해 정적인 곳에 숨고 싶었고, 고양이가 좋았으며, 공기 좋은 곳에서 여유롭게 글 쓸 시간을 얻고 싶어서 시골에 있는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순진한 희망 사항일 뿐이었고, 어느새 그는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가 전하는 큐레이터로서의 일상은 정장과 하이힐로 갖춰 입고 우아하게 전시장을 누비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까마득히 먼 우주 너머에서 펼쳐지는 대혼란 그 자체였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706/pimg_7258792673473701.jpg)
전쟁을 방불케하는 '전시'의 모든 것을 쏟아낸 1장을 통해 기존 큐레이터의 이미지는 쨍그랑! 부서지고 만다. 텅 빈 화이트 큐브가 있다. 전시를 기획하여 그 공간을 주제에 맞춰 채우고 관람객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철거하여 텅 빈 화이트 큐브만 남았다. 수많은 이들과 작품들이 오고 가던 공간을 가득 채우던 아우성이 사라지고 고요가 찾아올 때까지 큐레이터는 한결같이 그곳에 존재한다. 업무가 분리된 큰 박물관과는 달리 설치와 철거, 벽면 보수까지 껴안은 시골 박물관 큐레이터는 지치지도 않고 또다시 지역 작가를 위한 전시와 소외된 이들을 돌아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호기롭게 진행한다. 망했다고 표현된 글 끄트머리에 애정이 잔뜩 묻어있다.
일을 하다가 지치면 수장고에서 홀로 재충전을 한다는 저자는 수장고를 찾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다양한 업무로 쫓기고 민원 전화에 전시 연계 체험용 의상을 다림질까지 처리해야 한다. 그런 순간에는 큰 기관에서 일하던 때를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전시의 1부터 100까지 오롯이 혼자 처리해 힘들지만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자기 생각대로 할 수 있는 작은 박물관 큐레이터라서 다행이라 여긴다. 큐레이터로서 충만한 만족감이 전해져 와서 부러웠다.
항상 부족한 예산과 항상 넘치는 잡무에 현재에 의문을 품고 의미를 잃어버린 채 회의감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고작' 전시 따위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힘을 보여주기도 하고, 예술을 통해 삶의 위안을 얻고 재미를 느끼고 희망을 품기도 하는 기적 같은 경험들 덕분에 저자는 오늘도 박물관으로 출근한다.
박물관이라는 공간에서 시간의 제약을 벗어나 작품을 매개로 교감하는 관람객의 모습은 참 다양하다. 우대 단골 고객인 어린이 단체와 가족 단위 관람객들은 큐레이터의 신경을 곤두서게도 하지만 놀라운 감동의 순간을 선사하기도 한다.
<70년 전의 편지> 챕터는 강렬한 아우라를 뽐내며 박물관 블루스를 장식한다. 생활사 유물들 중 사람들의 삶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편지'로, 유물 정리 중 연애편지를 발견한다. 한국전쟁에 파견된 한 미국인 병사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쓴, 70년 전 편지의 주인공을 찾는 이야기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가 담긴 사사로운 편지가 유물이 되어 후세에 전해진다는 것이 새삼스럽고 놀라웠다.
큐레이터의 다양한 면면들을 잘 보여주고, 시골의 작은 박물관 큐레이터로서 느끼는 책임과 자각, 고민을 담담하게 하지만 의미 있게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뮤지엄을 사랑하는 덕후로 은혜로운 성덕임을 자랑스러워한다.
자신이 느낀 예술 속 아름다움과 의미를 타인과 공유하고자 끊임없이 고민하는 저자 같은 큐레이터 덕분에 퍽퍽하고 건조한 현대인 일상이 아름다워지고 풍성해진다. 잠시 시간을 내어 말을 걸어오는 작품을 만나러 전시장을 가보는 여유를 챙겨보면 좋겠다.
<소소하게, 큐레이터>를 통해 들여다본 큐레이터의 공간은 흥미롭고 매력적이었다. 일하는 사람으로 만나본 큐레이터, 주변에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세계를 여행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문학수첩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