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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 영국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사랑과 긍지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2년 6월
평점 :
"살아있으니 우리 모두는 친구다."
긴축재정에 대해 통렬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던 브래디 미카코가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통쾌한 문체로 우리를 휘어잡는다. 브렉시트로 대두된 아저씨에 대한 비난과 혐오가 만연한 시대에 '해머타운의 아저씨들'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문제적인' 존재로 간주되는 그들이 남편이자 이웃인 그녀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힘이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내게 영국의 노동계급 아저씨에 대한 이미지를 구체화시켜준 영화들이 있다.
풀 몬티(1997년작)
빌리 엘리어트(2000년작)
두 작품 모두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총리로 있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현대화로 제철소가 문을 닫아 실업자가 되거나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을 강행하는 것에 노조가 장기 파업으로 대항한다. 실업자가 된 노동자들, 파업과 시위를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영국 노동 계급의 아저씨로 각인되었다. 두 영화의 결이 다른데,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소설 속 '해머타운의 아저씨들'은 두 영화 어느 장면에서도 어색하지 않다. 신기한 일이다.
브래디 미카코는 남편을 비롯한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아저씨들의 일상을 서술하고 있다. 브렉시트 찬성파로 악역, 악마로 낙인찍힌 그들이 일상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애처롭고 안타깝다가도 정의로우며 사랑스럽고 또다시 먹먹하게 만든다. 영국 노동자로서 권리와 임금 그리고 고용 조건을 건강한 노동 시장을 바라는 그들의 간절함이 브렉시트로 발현되었을 뿐이다. 건강한 복지국가에서 성장하고 일했던 그들이 이민자들에게 자신의 밥그릇을 뺏기는 것 같은 불안감과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절실하게 다가온다.
교육, 의료, 실업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탄탄한 복지 시스템이 구현되었던 시대를 경험한 이들이기에 긴축 재정으로 붕괴된 복지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게 힘겨웠을 것이다. NHS 국가보건서비스와 노동조합의 힘을 믿는 순수한 노동 계급의 아저씨들은 그들의 쓰러져가는 왕국을 다시 세우기 위해 EU 탈퇴를 찬성한다. 그리고 EU를 탈퇴하면 영국이 EU에 지불하는 거액의 분담금을 NHS에 쓸 수 있다는 달콤한 유언비어가 크게 이런 생각을 거들었다. 그들은 잔류파가 투표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여 정부와 EU 관료들을 위협하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찬성 표를 던졌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탈퇴 찬성 표가 더 많았다.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브래디 미카코 지음/노수경 옮김/사계절
힘겨운 하루 일과를 보내고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피로를 푸는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자들은 점차 입지를 잃어가고 있다. 수명은 늘어가고 직장을 줄어들고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가능하게 해준 NHS 의료제도 또한 붕괴되고 있다. "질병은 공동체가 비용을 함께 부담해야 하는 재난이다."라는 발족 이념마저 빛이 바랜 오늘날 우리의 해머타운의 아저씨들은 절대로 NHS를 포기할 수 없다.
해머타운의 아저씨 세대는 현 사회에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말처럼 삶의 주된 배경이 되는 시대가 너무 다르다.
'이마에 땀이 맺히도록 일하면 보수를 받는다'와 같은 삶의 방식은 이제 지겹다며 젊은이들이 대항문화를 형성하던 시대를 살았던 베이비부머 세대와 '이마에 땀이 맺히도록 일해도 보수를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라는 보합제와 제로 아워 계약이 횡행하는 오늘을 살고 있는 Y 세대는 극명하게 대치하고 있다. 어느 한쪽의 잘못이라고 특정 지어 말할 수 없는 아니, 이는 대립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폭력과 혐오로 이어지게 부추기는 사회와 위정자 그리고 언론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본다.
더 이상 이민자 NO!를 부르짖던 아저씨들이 일상 속에서는 철없는 십 대 아이들의 배외주의를 꾸짖고, 외국인 아이의 얼굴에 묻은 초콜릿을 닦아주는 친절함을 보인다. 이는 모순적인 모습이라기 보다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생존의 문제와 영국 노동자의 임금과 안정된 고용 조건을 지키기 위해 브렉시트를 찬성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존중과 따뜻한 배려는 당연한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겉모습에 놀라 도망가고 싶다가도 그들의 투박한 호의에 스르르 이끌리게 된다. 저자 브래디 미카코의 글 저변에 깔린 애정에 어느새 물들었나 보다. 글을 읽다 상상하며 피식 웃고 있는 나를 보면 말이다.
해머타운의 아저씨들의 가감 없는 이야기를 뒤로하고, 제2장에서는 영국의 세대와 계급, 술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출생연도에 따른 세대에 대한 구분은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일반적인 구분법이었다. 그것보다는 영국 특유의 세대가 설명된 페이지가 흥미로웠다. 좋아하는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유래한 브리짓 존스 세대와 그의 남자친구들인 래즈 세대 설명이 눈길을 끌었다.
노동 계급은 문화적 계층이 아니라 경제적 계층으로 다양한 인종을 포함하고 있다. 그 다양성이 노동 계급의 결속력을 약화시킬 것처럼 부풀려지지만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인종, 문화, 종교, 젠더에 상관없이 같은 지역에서 같은 수입으로 일하는 한 경제적인 문제는 공통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의 흔적, 조각들이 얼기설기 엮여 또 다른 이야기와 관계를 만들어가는 그들의 순수한 역사를 읽으면서 '아저씨' 카테고리 안이 다채로워지고 있다. 논리적으로 말하는 아들에게 밀리는 듯해 소리를 냅다 지르는 모습에서부터 눈 오는 밤 길가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자를 가엽게 여겨 흔쾌히 집에서 재워주는 용감무쌍한 모습 이면에 멀리 떨어져 잊을 만하면 연락을 전하는 또래의 아들을 떠올렸을 애처로운 부정과 나이, 국경, 외모 다 상관없이 사랑 하나에 설레는 모습까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적절한 음악과 함께 여유롭게 수용하고 있다.
야단맞고, 멍청한 일을 하고, 호되게 당하고, 엉덩이를 내놓으면서
아저씨들의 인생은 앞으로도 이어진다.
애정이 가득 담긴 영국 노동 계급의 아저씨 이야기를 정신없이 읽다 보니 기분이 유쾌해졌다. 영국 아저씨들의 인간적이고 유쾌하고 다정한 일상을 공유하면서 그들이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된 이유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브래디 미카코 저자가 원흉으로 지목하는 '긴축 재정'이라는 놈은 정말 죄가 많은 것 같다.
아저씨들의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몇 개가 있다.
션의 <브라이턴 동화> & 스티브의 <노 서렌더> & 사이먼의 <타올라라, 사이먼> & 레이의 <데어 제너레이션, 베이비> & 마이클의 <그랜 토리노를 들으며>
"나는 온 세상을 여행하며 알게 되었어. 노동조합이 약한 나라의 노동자는 슬픈 존재라는걸."
사이먼은 노동조합에 들어가 노동 운동을 하지 않는 젊은이와 이민자들이 싫었던 것이다.
반면에 노조에 가입해 싸우던 예전의 이민자들은 좋아했단다.
요즘 들어오는 EU 이민자들은 몇 년 동안 일을 하고 돈을 저축해 자기 나라로 돌아갈 생각만 하며
"영국 국내 노동자의 대우와 임금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그를 열받게 한다고 했다. (125쪽)
평상시 나의 이민자와 노동 시장에 대한 얕은 생각(별로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다)을 관통하는 충격적인 문장이었다. 이런 공동체 의식과 책임 의식으로 똘똘 뭉친 '해머타운의 아저씨들'을 나 또한 축복하고 싶어졌다.
워킹 클래스 히어로들이여, 언제나 인생의 밝은 면을 보기를!
영국의 베이비부머 세대와 밀레니엄 세대의 인정사정없는 싸움처럼 우리나라도 양극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혐오와 증오, 분노가 가득한 사회에서 자라나는 우리의 2세들은 어떤 미래를 꿈꾸게 될까? 두렵다. 향상심을 중요시하고 유유자적하고 싶지 않고 가족끼리의 화목한 시간보다 쉬지 않고 일하고 싶어 하는 레이첼이 자꾸만 떠올라 무섭다. 더더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의 껍질 속에는 아래로 추락할까 봐 무서운 두려움이 웅크리고 숨어있다.
개인이 온전히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고 매 순간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있다고 믿는 이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담론의 길이 열리기를 소망한다.
<사계절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