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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밀회/윌리엄 트레버 지음/김하현 옮김/한겨레출판
작가들의 작가, 우리 시대의 체호프
윌리엄 트레버가 선사하는
불가해한 삶에 대한 다정한 연민과 아름다운 위로
『밀회』
290 페이지에 12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소설책
한편이 2,30 페이지 정도인데도 그 안에서 삶의 단면인 '사랑의 잔재'를 섬세하고 다정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자매 앞에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남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 부인(고인 곁에 앉다), 죽어 있는 일곱 마리의 갈까마귀의 시체를 발견한 소년의 직감은 중년 후반이 된 소녀 벨라가 범인이라 말하고 그녀에 대해 순수한 관심을 넘어 은밀한 욕망을 꿈꾸게 된다.(전통)
변화하는 시대에 성당의 위엄은 사라지고 성직자의 영향력도 점점 약해져 가는데 마을의 부족한 소녀 저스티나의 고해성사를 듣고 신부는 결심을 하고 그녀의 집을 찾는다.(저스티나의 신부)
브라이언스턴스퀘어 소개 단체를 통해 만남을 가진 두 남녀의 동상이몽(저녁 외출)이 우아하게 그려진다.
유산을 남긴 여성과의 추억, 과거의 기만을 기억할 수 있는 장식품만을 받고자 하는 미련을 보이는 그라일리스(그라일리스의 유산), 서로를 알지 못하면서 곁에 머물고 자신을 위해 부부로 살아간 엄마 아빠를 떠나보내고 고독을 느끼는 나(고독), 신의 세상에서 불리한 환경 때문에 자신의 목표를 빼앗긴 조각상 제작자의 아내인 누알라는 신성한 조각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히고 평온함에 잠겨 조각상의 체념을 느꼈다.(신성한 조각상)
로즈의 대학 진학을 축하하는 파티에 개인 교사 부버리씨가 초대받았다. 로즈는 주 1회 그의 집에서 수업을 들었고 그때마다 그의 부인은 외도를 했다. 이를 알았던 로즈는 부버리 씨에게 말하지 못한 미안함과 그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고통 때문에 그리고 그녀 앞에 펼쳐진 창창한 시간, 언뜻 보게 될 다른 비밀과 배신들 때문에 울었다.(로즈 울다)
두 연인이 미래를 꿈꾸고 사랑을 맹세했던 일들이 틀어지면서 깨닫게 되는 사랑의 허망한 약속(큰돈),
웨이터로 일하면서 겪은 일로 사람을 죽인 전 남편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을 흘린다.(거리에서)
무용 선생이 들려준 음악이 브리지드 삶 곳곳에 스며들어 그녀가 떠난 후에도 영혼으로 남으리라.(무용 선생의 음악) 불륜으로 시작한 사랑을 끝내 이어가지 못하고 이별을 하게 되는 두 남녀. 하지만 그 이별의 순간마저도 부정하는 사랑의 불변함은 영원하다. (밀회)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거나 회상과 현재가 구분 없이 전개되는 글은 쉽게 허투루 읽히는 걸 거부한다. 덤덤하게 진행되지만 그 안에 녹아있는 감정선은 애써 무시하거나 꾹꾹 눌러왔던,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픈 불편한 내면을 흔든다. 격정적인 사랑이라도, 순수한 소년의 풋풋하면서도 내밀한 이성에 대한 관심이라도, 타인의 시선을 피해 은밀하게 나누는 외도일지라도 그의 손을 통해 탄생한 비밀은 우리네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똑같은 불편함이, 그녀가 참여하는 활동에서는 거짓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성가신 인식이 남아 있었다.
헤어질 때 두 사람에게는 약간의 놀라움이 남았다. 마땅히 일어났어야 할 상황과 비교하면 그들이 서로를 이용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존엄이었다. ...... 함께 나눈 즐거움만큼이나 은밀했다. _ 저녁 외출
사랑한다고 굳게 믿고 함께 하는 미래를 꿈꿔 결혼을 약속했던 존과 피나의 이야기가 마음에 닿았다. 두 사람이 사랑한 것은, 너무나 사랑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 미국이라는 곳을 함께 공유하지 못하게 된 순간 피나는 비극적인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존 마이클을 사랑하지 않는다. 끝나버린 사랑의 허약함을 아쉬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피나의 담담한 각성은 그렇게 단단했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을 읽다 보니 '사랑'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형태들에 대해 떠올려보게 되었다. 그리고 왠지 슬퍼졌다. 그리고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위로받았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 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