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책에 담긴 기억을 되살리는 -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
세상에는 진귀한 직업들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없고 관심이 없으면 미처 알지 못할 만한 직업. 이번에 만난 책이 바로 그런 직업을 가진 이가 이런 일도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책 수선가' = Book Conservation/Book Conservator
우리에게는 생경한 이 직업은 망가진 책을 수선한다.
망가진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파손된 책의 형태와 의미를 수집한다. 책이 가진 시간의 흔적을, 추억의 농도를, 파손의 형태를 꼼꼼히 관찰하고 그 모습들을 모은다. 책을 수선한다는 건 그 책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런 모습들을 존경하는 마음이다. _ 프롤로그 「내 직업은 책 수선가다」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재영 책수선 지음/위즈덤 하우스
좋아하는 책과 영화인 「냉정과 열정 사이」 주인공 쥰세이 직업이 유화 복원사였다. 그 영화를 통해 유화 복원사가 인지되었다. 그 절묘한 솜씨에 감탄하면서 자신의 그림을 그리지 않고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복원하는 데에 힘을 쏟는 데 의문을 가졌었다. 하지만 역시 그의 손을 거쳐 다시금 살아 숨 쉬는 유화를 대하면 순수한 감동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쥰세이 또한 명화의 시간이 계속되기를, 우리 곁에 영원히 머물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에 나오는 '복원'과 '수선'이 쥰세이를 자연스레 떠오르게 했다.
유화 복원사인 쥰세이는 원본 상태 그대로 되돌리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철저히 자신을 버리고 원본에 숨을 불어넣는 작업을 수행한다. 하지만 책 수선가인 저자는 의뢰인의 요구에 맞게 작업을 하기에 열린 가능성을 자유롭게 끌어안고 있다. 책 수선가는 '책 보존가'로서 책이 보내온 시간을 지우지 않고 담아내면서 책의 역사를 유지시키는, 귀한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재영 수선가가 소개해 준 책 수선 사연은 제각기 다른 이야기이면서도 모두 책, 종이와 함께 추억을 계속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를 위한 선물, 아이를 위한 선물, 할머니를 위한 선물 모두 모두 사랑하는 이에게 책에 기록된 시간과 흔적, 마음을 고스란히 하지만 더 예쁘고 단단하게 전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본인은 마법사가 아니라고 했지만 수선 전후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재영 수선가 손에 마법 지팡이라도 들려있는 건 아닌가 싶다. 실제 마법 같은 수선을 돕는 도구들에 대한 애정 어린 내용도 실려있다. 오랜 친구들을 소개하는 지면은 곳곳에 고마움이 넘쳐흐른다.
재영 책 수선가의 오랜 친구들(139)
나는 처음 접하는 책 수선이건만 이렇게 많은 이들은 어찌 알고 이렇게 소중한 인연을 맺어 추억을 더 단단히 엮었는지 신기하다.
♥ 할아버지께서 직접 한자 한자 쓰신 천자문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생전 할아버지를 기억하고자 하였다. 처음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을 가진 책으로 완성된 천자문을 읽으면서 마음을 담아 한자 한자 쓰시던 할아버지를 떠올릴 손녀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천자문 _ 한 글자씩 써 내려간 마음이 살아갈 집(192)
♥ 할머니께서 한국전쟁이 터지지 전까지 대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쓰신 일기장을 책으로 제작하였다.
윤여준 작가의 할머니, 정숙진 선생님의 대학생 시절 일기장(수선 전)
윤여준 작가의 할머니, 정숙진 선생님의 대학생 시절 일기장(수선 후)
빨간 선의 원고지에 쓰인 할머니의 힘찬 글씨체가 눈길을 끈다.
재영 책 수선가는 책에서 '옹골진 표현들로 쓰인 큰 울림의 문장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직접 뵙진 못했지만 의뢰인 윤여준 작가가 전한 이야기와 사진, 일기장으로 접한 정숙진 선생님 모습에서 노란 산수유 꽃이 떠올라 표지에 그림을 그리듯 산수유 꽃을 한 송이씩 완성해갔다고 한다. 그 책을 받으신 후 선생님께서 참 신기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였다니 손녀와 할머니, 재영 수선가까지 마음이 이어진 순간처럼 찌릿찌릿하였다.
재영 수선가님은 미국에서 '북아트'와 '제지' 분야로 대학원에 진학하게 하면서 '책 수선가'를 접하게 되었다. 새로운 전공에 익숙해지려면 숙련해야 할 기본적인 장비와 재료들, 그리고 손기술이 많았다. 난감해하던 중 지도 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책 수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풀질과 칼질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허당이었던 재영 수선가님이 미국 도서관 연구실에서 3년 6개월을 근무하면서 1,800권 이상의 책 수선으로 기술을 연마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재영 책수선》이라는 이름으로 독립된 작업실을 운영하게 되었다. 책임이 명확했던 연구원 시절과는 다르게 세무, 회계, 홍보, 상담 등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1인 자영업자로 탈바꿈한 재영 수선가님의 서사인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그 속에 담긴 책에 대한 진심이 닿아 종이책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더 많은 책들이 오랫동안 튼튼한 기억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재영 수선가님의 귀여운 후배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책 수선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이나 바람이 있다면?"
▶ 각각의 사연이 담긴 책과 주인과의 관계, 그 관계에서 파생하는 감정들이 물 위에서 파동을 일으키며 매번 내게 와닿는다. 예전에는 그 물의 언저리에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면, 지금은 그 파동의 중심으로 한 발자국씩 조금 더 깊이 들어가고 있다. 세계의 확장을 꾸준히 경험하고 그 확장의 경계에서 다양한 감각의 재미를 찾는 게 계속해서 가능하길 바란다.
"만약 책으로 태어난다면 어떤 책이 되고 싶냐?"
▶ 내가 망가졌을 때 책 수선가에게 데려가 줄 수 있는 애정을 가진 주인의 책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책은 영원히 수선이 계속 가능한 건가요? 어느 시기까지 책 수선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 책은 영원히 수선이, 아니, 진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책의 진화론을 믿는다면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책을 수선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나의 손때가 묻은 책,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던 책, 나를 꾸짖어주던 책, 나를 이해해 주던 책......
이미 만난 책들과 만나고 있는 책 그리고 언젠가 만날 책들을 이제는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다.
망가져도 고쳐줄, 더 단단하게 이어줄 존재가 버티고 있기에.
여러분은 어떤 책을 수선하고 싶으신가요? 책 수선가를 소개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