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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평점 :
강렬한 인상을 내뿜고 있는 가지이 미나코와 호랑이가 변한 듯한 버터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황금빛 액체로 변하는 호랑이가, 그 버터를 소개하는 듯한 가지이 미나코가 시작부터 분위기를 압도한다.
우유는 소의 피라고 한다. 그래서 노란 표지를 벗겨내면 빨간 표지의 책이 나온다. 피가 우유로, 우유가 버터로 변하는 가운데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숨어져 있는 건 아닌가 싶다. 빨갛고 하얗고 노랗게 변하는 과정 속에 우리를 흔드는 무언가가 있다.
버터/유즈키 아사코/권남희/이봄
작가 유즈키 아사코는 2009년 일본 열도를 경악시킨 '수도권 연속 의문사 사건' 일명 꽃뱀 살인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범인인 기지마 가나에를 모델로 가지이 미나코라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실제 사건이 불러온 파장을 재해석하여 <버터>를 집필하였다.
세 명의 남성 살해 혐의로 수감 중인 용의자 가지이 미나코는 흔히 생각하는 꽃뱀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30대 중반의 뚱뚱한 여성이었다.
사건의 본질이 흐려지고 여성 혐오로 번지는 양상을 띠는 가운데 주간지 기자 '마치다 리카'가 '가지이 미나코' 인물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녀를 인터뷰하기 위해 공을 들이게 되고 친구인 '사야마 레이코'의 조언대로 레시피를 물었더니 냉담하던 가지이 미나코가 변했다.
주요 등장인물들인 리카, 레이코, 미나코 모두 상처가 있는 인물이다.
리카는 부모님 이혼 후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며 한 달에 한 번씩 아버지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리카의 아버지가 갑자기 죽었다. 리카는 이 죽음에 대해 부채를 느끼고 있다. 중학생인 그녀가 아빠와 약속된 날에 가지 않았고 얼마 되지 않아 죽었기에 책임을 느끼고 있다.
"줄곧 잊고 있던, 봉인해온 분노를 문득 자신의 갈라진 살 틈으로 들여다본 기분이 든다." (32쪽)
레이코는 절친인 리카와 성적인 얘기를 전혀 하지 않을 정도로 결벽하다. 부모님하고도 연을 끊고 산다. 이는 어린 시절 부모의 외도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이다.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
미나코는 너무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되어버린 여성이다. 성향이 너무 다른 어머니는 그녀에게 다이어트를 강요하고 이는 관계가 어긋나는 결과로 이어진다. 아버지와의 깊은 유대관계는 그녀에게 일그러진 성 역할, 성관념을 심어주게 된다.
가지이 미나코에게 빠져들어 동화하는 듯한 리카의 모습. 기존에는 일에 집중하여 집도 음식도 챙기지 않았는데 '버터 간장밥'을 계기로 미각에 눈을 뜬다. (우리집 아이들도 좋아하는 메뉴라 에쉬레버터에 대한 관심이 생겼어요.)먹고 싶은 것을 직접 만들어서 마음껏 먹는다. 이런 것을 풍요로움이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영역에 발을 딛고 확장된 그녀의 세계를 환영한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일련의 제약들로 인해 주간지 기자로 의식 있는 사람인 리카조차 외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뚱뚱하다는 게 자기관리를 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다로 이어지고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리카는 가지이 미나코와의 만남을 통해 맛에 눈을 뜨고 요리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몸이 변하고 가치관도 조금씩 변하게 된다.
가지이 미나코를 좋아하게 된 리카는 그녀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지만, 가지이는 단호히 거부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숭배자뿐. 친구 따위 필요 없어." (156쪽)
리카는 가지이에게 3명의 다른 피해자처럼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그러면서 리카 주위의 친구들은 긴장하게 되고 레이코는 그녀를 위해 큰 결심을 하게 된다.
<버터>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사회에서 여성에게 강요하는 역할, 희생, 이미지 등을 '버터'를 중심으로 풍미 가득한 요리의 세계와 함께 풀어나간다. 버터가 지닌 황금빛 풍미가 글 곳곳에 스며들어 뚝뚝 떨어지는 맛의 향연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녹아들어 갔다. 가지이가 좋아하는 버터는 그렇게 매혹적이다.
리카가 가지이에게 끌렸던 이유, 가지이는 여성에게 강요되는 역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날씬함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하고 자신을 인정했다. 그런 모순적인 태도에 대한 호기심과 가지이와 얽힌 남성들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아는 것을 통해 자신이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부채를 털고 당당하게 마주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리카와 리카 주변 인물들의 관계가 가지이와의 면회를 통해 피폐해져가는 그녀의 영혼을 치유해 줄 수 있어서 가지이의 피해자들과는 다르게 리카는 건강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쉽지않은 과정을 거쳤다. 가지이와의 만남이 리카에게 많은 혼란을 가져왔지만, 리카의 삶을 풍요로워졌다고 생각한다. 일에만 치중하지 않고 자신을 돌보게 되고 지인들과 제대로 교류하게 되면서 리카가 진정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손님인 시노리 요시노리의 맨션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교차로 같은 집, 정자 같은 집을 마련하는 리카를 보면서 그녀의 강한 면모를 새삼 느낀다. 그리고 가지이의 레시피를 수정해가면서 자신의 맛을 찾아가는 점도 인상적이다.
"리카는 리카가 없는 곳에서 리카를 아는 사람들끼리 친해져서 새로운 관계가 생겨도, 여러 방향에서 리카 얘기를 해도 별로 신경쓰이지 않지? 그런 사람 상당히 드물어. 다들 손해보지 않으려고, 가진 것을 지키는 데 필사적이잖아." _ 레이코가 리카에게 (447쪽)
여왕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정해진 틀만 고집하는, 외로운 가지이. 사람을 조종하는 일이 유일한 처세술인 그녀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방이 움직여주는 것이 인간관계라 여겨져 예측이 불가능하면 즐기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쟁이이다. 퐁파두르 부인이 되고 싶다고 하였으나 가장 사랑한 것은 본인이었던 그녀는 3명 아니 아버지와 아가노 맨션에서 자살한 남자까지 주변 5명의 남자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일까?
"내가 만약 사람을 죽였다면 당신과 같은 방법인 거야. 그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앞에 갑자기 나타나지 않은 것뿐. 풍성하게 주던 것을 아무 예고 없이 뚝 끊은 것뿐." _ 가지이 미나코의 고백 (392쪽)
"다들 엄마가 돌보지 않게 된 아기처럼 말이야. 이상하지. 아무것도 못하고 나한테 응석만 부리던 그들이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을 텐데. 언제나 나만 기를 쓰고 움직이는 것 같고...... 나는 정말로 혼자구나 생각했어.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_ 가지이 미나코의 고백 (394쪽)
시노이씨 말처럼 누군가와 함께하는 호흡이 중요하다.
리카, 레이코, 시노이씨처럼 주위의 인연들을 제대로 마주 보고 대할 수 있는 여유와 당당함, 배려가 중요하다.
<꼬마 삼보 이야기>의 호랑이, 삼보, 아버지처럼 명확한 인과관계는 없다. 아버지가 가져온 버터가 과연 호랑이들이 녹아서 생긴 버터일까? 아버지도 삼보도 모를 일이다. 그 책을 읽은 우리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일 수도 있다.
가지이 미나코를 이해한 리카는 그녀를 초대한다.
"단지 많은 사람이 비난하는 여자아이를 혼자 응원할 용기가 없을 뿐인 거야." _ 마코토에게 리카가 430쪽
리카는 이제 자신의 적정량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이 분명하다.
"금식이 면제되는 사람은 여행자, 환자, 임산부, 어린이, 생리 중인 여성, 의지력이 약한 사람, 그리고 실수로 금식을 어긴 사람."
괜찮다. 할 수 있는 사람만 하면 된다. 모든 일에 다 해당하는 얘기다. 지치지 않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도 좋고 계속 성장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치는 게 더 중요하다. 자신의 적정량을 받아들이자.
책을 읽으면서 어떤 요리일지 상상하게 되고 입맛을 다시게 되는 활자의 맛 향연을 제대로 즐긴 기분이다.
활자로도 이렇게 식욕을 자극할 수 있다니 놀라운 책이다. <버터>
"시럽을 듬뿍 머금은 작고 단단한 파이는 어금니가 찌릿할 정도로 달아서 평소 쓰지 않는 뇌의 부위에 꿀 색깔의 빛이 내리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_ 터키의 라마단 체험행사 중 리카 553쪽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