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 위의 남자
다니엘 켈만 지음, 박종대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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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틸】은 강렬하게 시작한다.

- 신발 -

지금까지는 우리에게 전쟁이 찾아오지 않았다. (첫 문장)

한 시골마을에 유명한 광대 '틸 울렌슈피겔'이 나타나 한바탕 공연을 펼친다. 공연은 절정에 치달아 틸이 줄을 타고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틸의 재촉에 신발을 벗어던지고 신발을 맞아도 개의치 않고 웃는다. 그러다 틸의 욕설에 눈살을 찌푸리며 자기 신발을 찾아 헤매기 시작하는 데, 신발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동안 쌓였던 숨겨두었던 꾹 눌러두었던 분노, 질투가 폭발하였다. 서로 치고받고 뒹굴고 물어뜯고 우는 난장판이 되었다.

그리고 슬며시 틸은 다시 마차를 타고 떠났다.

이후 아무도 그 난장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잊히지 않고, 마을 곳곳에 주민 틈틈이 남아 의아함과 두려움을 불러왔다.

1년 뒤 전쟁이 우리를 찾아왔다. (32쪽)


틸이 지닌 광대로서의 능력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타인의 마음을 긁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이나 치부를 드러내게 만든다. 익살스런 시작으로 호응을 돋우더니 어느새 바보, 멍청이 취급을 당하니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게 된다. 이런 틸이 전해주는 독일의 30년 전쟁 이야기에 우리는 초대받았다. 이제 초대장을 펼쳐보자.


틸_줄 위의 남자, 차례



틸의 유희 <신발>

유명한 광대 '틸 울렌슈피겔'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그려지는 <공중의 제왕>

30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추스마르스하우젠 전투>

30년 전쟁의 발발 동기인 <겨울왕>

틸과 넬레의 고난으로 대표되는 민중의 고통 <굶주림>

종교인의 독선 <빛과 그림자의 위대한 예술>

틸의 각성 <갱도>

30년 전쟁의 끝 <베스트팔렌>



틸, 줄 위의 남자/다니엘 켈만 저/다산책방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소설이 아니기에 더 집중해서 읽게 된다.

중세 민담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광대 '틸'을 중심으로 30년 전쟁의 허상과 이면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 길고 긴 전쟁 속에서 이름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민중들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30년 전쟁의 사건 곳곳에 틸은 함께 하여 우리에게 피폐해진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민중들이 사는 마을에 수년간 양쪽 군인들이 몰려와 약탈을 반복하고, 어떤 군대에도 속하지 않은 약탈병들까지 등장하여 다 앗아간다. 이런 상황에서도 왕과 제후, 황제는 자신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전쟁을 이끌기 위해 정치를 하고 궁정광대 틸을 옆에 두고 유희를 즐긴다. 틸은 이 모든 역사의 산증인이고 후대에 남길 이야기꾼으로 노래하고 연극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종교적인 이유로 시작된 전쟁이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각국의 이권 다툼의 장으로 변해버린 30년 전쟁이 낯선 전쟁이었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여느 전쟁처럼 민중의 고통과 한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면서도 틸이 들려주는 익살, 해학이 단순히 무거운 역사만이 아닌 상상력이 펼쳐지는 장이 된다.


외줄타기는 추락으로부터의 도주이다. 


틸이 광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제공한 예수회의 독선으로 가득찬 마녀사냥이 그려지면서 종교의 이름으로 통제, 억압하던 시대의 아픔이 크게 다가온다.

종교인, 왕, 제후 등 기득권층을 꼬집고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주저함이 없는 틸을 곁에 두고자 하는 겨울왕과 겨울왕비를 보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그들이지만 진정한 친구를 찾을 수 없는 허전함과 외로움을 엿볼 수 있다. 자기를 비웃고 풍자하는 틸에게 오히려 위안을 얻고 함께 하고자 하는 겨울왕비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에게 틸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말한다.



"평화로운 죽음보다 더 좋은 게 뭔지 알아? 죽지 않는 거야. 그게 훨씬 좋아."

"난 이제 간다. 항상 그래왔어. 어떤 곳이 비좁게 느껴지면 난 떠나. 난 여기서 죽지 않아. 오늘은 죽지 않아. 죽지 않을 거야."



광대의 자유로운 영혼이 안내하는, 판타지와 현실을 넘나드는 30년 전쟁의 서사를 이제 덮는다. 부디 모두에게 틸의 유희가 전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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