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사랑을 몰라서
김앵두 외 지음 / 보름달데이 / 2020년 11월
평점 :
품절

작가 5인의 글은 시가 될 수도, 혹은 에세이, 산문, 짧은 일기가 될 수도 있다. 글을 쓴 5인의 작가 중에서 나는 김앵두 작가의 글이 제일 좋았다. 김앵두 작가가 쓴 글은 숫자가 제목이다. 딱히 주제를 정하지 않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갔나 보다. 다른 작가들과 다르게, 이름이 없이 번호가 제목이 되니,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야 글의 의미가 읽힌다. 정형화되지 않은 느낌이라 글이 찐 하게 와 닿는다. 처음으로 내게 의지하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 어머니의 편지를 처음 받았던 날, 지금 생각하면 풋 하고 웃음이 나는 10대 시절. 여지없는 추억 이야기지만, 사랑했던 대상에 따라 추억의 공감이 깊어진다. 추억과 사람을 이야기하는 글은 '우리는 사랑을 몰라서' 라는 책의 이름과 썩 잘 어울린다.
page. 23
그녀가 건넨 수 만 가지의 단어와 문장들이 당신에게 닿지 못하고 그녀의 자리로 돌아와 발밑에 쌓인다. 온통 당신으로 뒤덮인다. 머리끝까지 잠겨도 좋을 당신은 어디 쯤에 있을까.
page.47
추억은 끝도 없이 팽창한다. 찬란했던 시절은 세월의 격간 사이사이로 솟는다. 존재한 적 없는 것 같이 흔적이 미미해졌으나, 분명 존재했던 시간들, 돌아 갈 수 없음은 더욱 돌아가고 싶게 만든다.
page.49
시간이 흐르고 어느 덧 10대의 시절이 까마득 해졌다. 그때의 참을 수 없던 부재의 시간들은 당연하고 익숙해진다. 모두 닿는 거리에 있고 각자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여기며 나 또한 살게 된다. 네가 조금도 아프지 않기를. 네가 하는 일들이 너를 힘들게 하지 않기를, 나도 너처럼 유연한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 너와 너희들을 새긴다.
작가 시훈은 추억 속 그녀를 떠올린다. 도서관 2층에서 입 맞추던 날, 항상 글을 쓸 때면 그녀와 나 사이를 추억 해 몰입했고, 궁금해하며 현재를 추측했다. 그러다 영화에서만 일어날 것 같은 일이 일어난다. 비행기 뒷자리에서 사랑했던 이와 마주친다. 3년 만에 스친, 그런 인연으로 만난 그녀와 나를 담대하게 표현한 ...그 글은 그녀에게 쓰는 나의 감정, 작가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시훈 작가의 글은 전부가 남 녀간의 사랑 이야기다. 군대, 직장, 중년이 된 후, 사랑하는 그녀에 대한 감정들이 글의 주제와 어우러진다.
page.152
취급주의
사랑에 내 삶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으나
번번이 내 삶을 다하기 전에 떠난 사랑들.
사랑들도 나름의 삶이 있었음을.
page.195
-나는 당신이 '사라진다'라고 타이핑을 쳤지만
그건 너무 절망적인 것 같아서
그 문장을 지운 다음
어떻게든 살아진다... 라고 타이핑했다. -
선지음 작가의 글을 읽고, 지나간 사랑이 떠올랐다. 그 추억은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없다. 시간은 흘렀고 아련해진 추억이다. 작가가 말하는 문장 하나 하나가 그의 감정을 말하는 것 같아 자꾸만 과거가 생각났다.
page. 290 <평행>
아무리 가도 닿지 않는 사람이다, 당신은, 처음 만났을 때의 차가운 공기는 저 멀리 사라졌고 여름이 성큼 다가왔는데,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있고 당신은 여전히 한참을 멀리 서 있다. 나와 같은 마음인 줄 알았건만, 그 같은 마음이란 것은 몇 마디 공허한 말과 함께 내게 오기도 전에 사라진다. 내게 닿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거리가 너무 먼 탓일까, 아니면 애초에 그댄 내게 어떠한 말도 보내지 않았던 탓일까. 전자와 후자를 저울질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대의 의지가 확고했다면 발걸음을 팔아 서라도 내게 마음을 전달했을 테니까.
지금 사랑을 하고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랑을 기억하고 추억 할 수 있다. 언제고 느껴봤을 감정들, 혼자서 했던 짝사랑, 혹은 첫사랑. 그 애틋했던 시간들을 책은 충분히 떠올려 볼 수 있도록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