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란 무엇인가
한병철 지음, 김남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무지를 옮겼다. 원래 발령 받는 주기보다 2년 이르게 전근 신청을 했고 받아들여졌다.

전 근무지에서의 2년 반은 싸늘한 바람이 부는 황량한 벌판에서 옷 한 벌 없이 서 있는 것과 같았다. 함께 할 이는 없었다. 나도 누군가와 함께 해 주지 못했다. 나는 장악 당했다. 불행했다.

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알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조직의 장과 함께 근무했다. 자신이 모르는 일이 벌어지면 소리를 지르고, 모욕을 주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었고 임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자에게 꼬리를 내렸고 약자에겐 더욱 강해졌다. 경력이 적고 지위가 불안정할수록 모욕은 심해졌다. 웃고 싶지 않았지만 웃어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내가 훼손되는 느낌이었다. 너무 많이 상하고 깨졌다. 쉽게 판단 당하고 필요에 따라 이용 당했다. 인간 이하였다. 그저 도구일 뿐이었다.

공간마다 중력은 다르게 작용한다. 집의 중력은 1.2G, 지금 근무지의 중력은 1.3G. 이전 근무지의 중력은 4G. 혼자 걷는 산책길의 중력 1G. 중력이 다른 곳으로 오니 몸이 날아갈 것 같다.

이 책에 따르면 권력은 자아를 연장하고자 한다. 강력한 매개가 있으면 타인의 자아가 연장된다. 그럼 자아는 타인의 정신 안에도 존재하게 된다. 반면 매개가 약하거나 없으면 권력은 억압적인 형태를 띈다. 타인의 행위는 장악했을지라도 마음은 장악하지 못한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타인의 동의를 얻으면 나의 실체가 없어지더라도 나의 의지는 연장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이 겉으로만 뜻을 따라줄 뿐이라면 내가 없어지기 무섭게 나의 연장은 단절된다.

나의 이전 근무지 장처럼 누가봐도 권력을 추구하고 있고 그것이 지나쳐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오히려 약한 권력이고 두렵지 않은 권력이다. 거부하거나 도망칠 수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내가 마음 속으로 완전히 동의하고, 심지어 당연하게 여기거나, 당연하게 여길 필요조차 없어서 한 번 생각해 보지도 않고 받아들인 권력들이다. 예를 들어 과학적 지식, 경제적 현상, 금융, 가족관계, 국가제도, 민족, 역사, 수학, 도덕, 법질서 등.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절대적 권력을 형성한다. 공동체의 이익과 나의 안녕을 보장한다고 여겨지는 이 절대적 권력이 어쩌면 타자를 함부로 판단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중일지 모른다.

조국에 대한 애국심에 눈멀면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게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다.'는 식의 말을 하게 된다. 베트남전 참전 당시 있었던 부끄러운 행위나 아버지 없는 필리핀, 한국인 혼혈아 문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존재하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익숙한 것을 낯설 게 보는 눈이 필요하다. 그래야 타자를 '환대'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년 만에 신혼여행'은 장강명과 HJ의 신혼여행 이야기이다. 그들의 만남부터 결혼까지를 짧게 다루고 3박 5일간의 보라카이 여정을 상세하게 다룬다. 여행기를 읽고나면 보통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은 지난 여행 사진을 꺼내보고 싶게 만든다.

나는 까칠한 남자를 좋아한다. '신혼일기'의 안재현을 보며 군침을 흘리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다정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퉁명하게 대꾸하고 후회하는 타입이다. 꼭 남녀 관계에서만 그런 건 아니다. 나를 칭찬하거나 나에게 다정하게 굴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중학생 시절이었다. 친구가 have와 has를 구분하는 방법을 물어봤다. 나는 'has'는 세 글자니까 단수고 'have'는 네 글자니까 복수라고 외웠어. 하는 식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이게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본 우리 수학 선생님이 '참 똑똑하네' 칭찬해 주셨는데, 나는 그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선생님을 노려봤다. 아아, 노려보고 말았다. 20년이 흘렀는데도 선생님이 당황한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는 바보다.
꼭 다정함에 대처하는 방법을 몰라서 까칠한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까칠한 남자와 있으면 너무 웃기다. 내가 차린 밥을 먹고 남편이 자리를 털고 일으나며 '내가 먹었으니 니가 치워.'하면 그게 너무 웃기다. 나 혼자 '이런 미친ㅋㅋㅋㅋ'하면서 키득거리고 나중에는 혼자 알기 아까워서 주위 사람들에게 남편 자랑을 하면 사람들 얼굴이 썩는다. 그 귀여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잘 없다.
요즘 좋아하는 까칠한 남자는 장강명과 정우열이다. 맹목적이지 않아서 좋다. 무언가에 눈먼 것처럼 달려드는 열정이 느껴지지 않아서 좋다. 적당히 냉담하고 균형 잡혀 있다. 좋은 것은 좋다고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한다.
며칠 전 직장 내 사모임을 탈퇴했다. 원체 집순이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여럿이 모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상황을 주도하고 싶은 유아적인 욕구(!)와는 달리 대화를 잘 따라가지 못하고 쉽게 피곤함을 느낀다. 지난 월요일은 모임이 예정된 날이었다. 일요일 오후부터 모임 걱정이 됐다. 잠자리에 들 무렵에는 무슨 핑계로 안 나갈까를 한참 고민했다. 요일을 혼동하고 멀리 왔다고 할까, 아프다고 할까, 본가에 일이 생겨서 갔다고 할까. 한참을 그러다가 문득 '내가 뭐하는 짓이지' 싶었다. 사람들을 기만할 생각을 하며 내 시간도 쓰레기같이 보내다니.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아주 감사하게도 모임에서 나를 꽉 잡아주었고 아주 죄송하게 거절을 했다.
그냥 이렇게 하면 될 일이었다. 다행히 모임 사람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만약 얼굴을 붉히거나 서운한 마음으로 끝났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체적인 근거나 명확한 증거가 없이 배제와 차별, 증오, 적의의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표현이 다원성, 관용, 관대함을 이유로 허용될 수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광금지, 에바로드 - 2014 제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연합뉴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의 주인공 박종현은 83년생 남양주 출신의 개발자이다. 몸으로 부딪혀 세상을 배웠고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세상을 보는 안목과 사람에 대한 예의, 당당한 태도 등을 익혀 나갔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대문 뒷골목 인쇄소는 인터넷의 발달로 사양길로 접어들고 아버지는 알콜 중독에 빠져든다. 쓸데 없이 사람은 좋아서 빚을 내서 돈을 빌려주고, 집을 팔아 돈을 빌려준다. 어머니는 종현 씨가 젖먹이 시절 한 번,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또 한 번 집을 나갔다. 종현 씨와 종현 씨의 형은 얼마 되도 않는 집안의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의 이마에 포크를 던지며 싸운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 몸이 너무 작고,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은 안 나는데 의사가 와서 ‘떠나셨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감정을 추스를지를 못하겠더라구요.(180쪽)

우리 아버지는 산에서 돌아가셨다.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고 삼촌이 일주일을 산을 헤맸다. 일주일 간 휴대전화 신호가 계속 갔다.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발견한 삼촌은 구토를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발견되기 며칠 전, 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아버지는 평소 주무시던 대로 안방의 장롱 앞에서 모로 누워 있었다. 나에게 등을 돌린 채였다. 옷은 하나도 입지 않았다. 몸은 벌레에 물린 듯이 군데군데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중에 꿈 얘기를 들은 엄마는 ‘네가 미리 봤구나‘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시신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로부터 17년이 흐른 지금도ㅠ 혹시 아빠가 어디 살아 있는 게 아닐까,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곤 한다. 그 작은 유골함이 우리 아빠 48년 인생의 결말이라는 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가끔은 슬프지도 않다.

*가, 종현아.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해.(264쪽)

종현 씨는 항암 치료를 받는 어머니를 두고 에반게리온 스탬프 랠리를 위해 중국에 간다. 선이 곱고 소녀 같은 어머니는 종현 씨를 나무라지도 붙잡지도 않는다.

*타브리스가 왜 다른 자살 방법을 놔두고 손목을 그었는지 저는 몰라요. 자살할 정도로 절망한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저는 영원히 알 수 없습니다. ‘손목을 긋는 건 죽을 마음이 없었다는 뜻‘이라는 해석은 굉장히 무례한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남의 자살 방법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남의 이유에 대해서도 금방 쉽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짝사랑을 거절당하고 게이라는 사실이 들통 난다고 그게 뭐 죽을 이유까지 된다는 말인가. 세상에는 살아야 할 이유가 더 많다‘하고 말이죠.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 남의 삶과 죽음의 가치까지 제멋대로 정해버리게 됩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살아라‘ 하는 식으로요. 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그런 참견을 할 시간이 있으면 네 일에나 신경 써라‘거나 ‘그렇게 오지랖을 부리는 걸 보면 관계의존증이 틀림없어‘라고 되받아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광금지, 에바로드 - 2014 제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연합뉴스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 종현아.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