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 투명 시인선 1
최진영 지음 / 투명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집을 선물 받았다. 나이프가 그려진 자줏빛 시집을. 제목도 의미 심장하다. PK는 뭘까? 암호를 해독하듯 시집을 펼쳤다.


한편 한편 넘기는 시가 무겁다. 예삿 시쯤이겠거니 했다. 편견에 휘둘려 그랬다. 군댓밥 먹는 군인이 그것도 중사면 꽤나 많은 짬밥을 먹어야 했을텐데 감수성이, 아니 시상이 붙어 있겠어? 라고 생각 했다.


싸보여? 라고 묻는데 내 생각이 싸도 너무 쌌던 탓에 부끄러워 화끈거릴 지경이었는데 넘기는 시마다 직설적이고 얼핏 냉소적이기도 또 한편으론 애틋한 시인의 마음이 절절했다.


9쪽, 적막한 밤에


아버지라 대놓고 달아놓지 않았어도 적막한 밤 그늘에 스러져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채버려서, 그래서 목울대를 건드리는 시는 갑자기 흐려지는 통에 잠시 쉬어 가며 읽어내게 했다.


망설였다. 그가 사막처럼 울었던 어린 시절이 눈에 밟히고, 죽은 것이 아니라 도망간 이의 존재를 나는 상상도 안 되는 주제라서 감히 위로랍시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입을 닫는다.


웃음이 났다. 실소. 드디어 PK를 알았다. 그것도 친절하게 시인이 알려주었다. 이렇게 잔혹한 것을. 이런 세상이면 참 곤란하다. 나는 언제나 도망도 숨지도 못하고 죽기만 하게 될거라서.


PK : 게임 상에서 다른 플레이어를 죽이는 플레이어 킬링(Player Killing) 혹은 그 일을 행하는 플레이어 킬러(Play Killer)의 줄임말.


시를 잘 모르지만 몰라도 느껴지는 무엇이 있어 좋아라 했던 것을 오랜 시간 잊고 지냈는데 이 시집으로 다시 푹빠져 들었다. 촌철살인이라 할만큼 속 시원한 시부터 애틋한 사랑 노래도 있을 건 다있다 할정도로 여러 감각들이 살아 숨쉬게 만들어 준다. 몇번을 읽고 또 읽게 만든 시가 수두룩하다.


<유언>을 읽고 음미하면서 나도 나중에 이런 유언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필사 하고 말았다.




게으름에 밀려 서평을 기다리는 책들을 뒤로 하고 새해 첫날 이 시집을 먼저 잡았다. 시집은 맛 좋은 장터국수처럼 후룩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큰 착각이었다. 한 편 한 편 깊은 사유를 해야만 했다.


에필로그의 그의 순박한 이야기에 미소를 짓다가 그의 두번 째 시집을 기다리게 만드는 시를 만났다.


[가시] 전문

그래, 내가 가시라서

때론 나도 너를

안아줄 수 없다는 게 서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 투명 시인선 1
최진영 지음 / 투명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의 두번 째 시집을 기다리게 만드는 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 지우개
작가 水 지음 / 좋은땅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혹됐다. 파우스트를 환락의 구렁텅이로 이끌었던 그 악마의 유혹과 지우개라니. 제목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 나이 들고 더 이상 없어졌다 싶었던 호기심이 발동했다.


더구나 아동청소년 영어교육 드라마를 개발하는 작가 겸 프로듀서 일을 십수 년 하고, 임신과 더불어 공황장애까지 겹쳐 비자발적 전업주부가 된 작가가 고전 파우스트에서 영감을 얻어 써낸 글이라니 놀라기도 하고.


표지도 그렇고 기억을 잃어가는 '상실'에 대한 단편을 모은 소설인 줄 알았다. 한데 2013년 한국문학예술 드라마 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 지우개>를 포함한 5개의 드라마 시나리오 모음집이다.


과거 애니메이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던 때,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를 써보겠다고 용쓰던 기억이 살아났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읽을 만큼 순식간에 끝을 봤다. 재밌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그냥 빠져들었다.


우연히 고향 친구를 만나게 되고 달라진 외모에 현혹되어 '젊어지려'라는 유혹에 걸려든 주인공. 결국 끝은 파국으로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 한데 누가 메피스토펠레스 역할이었을까. 늙은 간호사? 아님 유미? 시정이 아들을 잃은 기억을 잃었던 것에 좌절하던 순간과 홈쇼핑 론칭에 등장한 시점의 시간 차는 열린 결말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저 이야기가 증발된 기분이다.


144쪽, 호상


​돌봄 현장에서 일하는 내게 한국 돌봄의 현주소를 현장보다 생생한 느낌으로 전하는 <호상>은 어쩌면 큰 짐이자 숙제를 안겨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슷하게 <수목장> 역시 안락사를 다루는데 몇 해 전 노환으로 갑자기 쓰러진 후 식물인간으로 중환자실에서 생명 유지만 하고 계신 노모의 상태로 심각하게 고민하던 지인이 생각났다.


264쪽, 수목장


특별한 치료도 없이 중환자실에서 그저 생명 유지 장치를 꽂고 계신 노모의 한 달 병원비가 자신의 월급보다 더 많다며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다고 토로했다. 노모가 의식 없는 하루를 연장하면 자신의 빛이 그만큼 늘어난다고 연명치료 중단을 고려한다며 눈물을 보였다. 내가 그 입장이면 어땠을까. <수목장>은 그때 그 질문을 다시 하고 있었다.


요즘 영화관을 뜨겁게 달구고 1000만 관객이 훌쩍 넘은 영화 <서울의 봄>이 전두환이 일으킨 12•12 사태(쿠데타)를 회자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새순>이 다루는 5•18광주 민주화운동이 더 뜨겁게 다가온다. 그 12•12사태 5개월 후에 일어난 비극적인 일이 바로 <새순>의 배경이 아닌가. 내 나이 10살의 봄이었다.


이 시나리오집은 모두 '기억'을 주제로 연극 혹은 드라마 형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과거의 일을 현재로 끌어와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외모지상주의를 꼬집으며 외모에 대한 탐욕을 보여주거나 돌봄의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기는 국가 시스템을 꼬집고,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연명치료와 안락사 문제의 자기결정권과 인간 존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데 공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무대와 화면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몰입도 넘치는 책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한게 쓴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 지우개
작가 水 지음 / 좋은땅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대와�화면을�눈앞에서 보는�것처럼�몰입도�넘치는�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끔 찬란하고 자주 우울한 - 경조증과 우울 사이에서, 의사가 직접 겪은 조울증의 세계
경조울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떡볶이와 죽음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던 백세희 작가의 이야기나 정신 병동에도 아침이 온다고 힘주어 보여주던 드라마처럼 양극단을 오가는 조울증이 보여주는 세계는 내게는 이해와 공감의 폭이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멘탈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닌데 잘 무심해지기 때문일지도.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읽으면서도 원래 사는 게 만만치 않고 보통의 삶도 버티는 게 죽을 만큼 힘든 거 아니냐고, 다들 그만 그만한 관계의 상처를 내고 입으면서 온몸이 너덜너덜 한 채로 버티는데 뭘 그리 유난일까 싶기도 했었다. 이 책을 보기 전까지. 그래서 지금은 조금 더 공감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1형과 2형의 차이가 뭔지, 우울과 우울 삽화의 차이를 모르지만 2형 조울을 10년 넘게 앓고 있고, 먹고 살기위해 의사라는 신상을 가린다는 귀여운 고백을 앞세운 저자의 솔직한 이야기라니 놀랍다. <정신 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간호사 다은을 보며 이 시대를 사는 동안이라면 정신질환은 누구도 예외는 없다는 사실이 더욱 공감된 것처럼 이 책 역시 그런 생각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나'와 직면하는 자신을 보면서 나 역시 그리 유쾌하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단정하는 '나'를 직면하고 말았다. 나는 왜 유년 시절이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사소한 일에도 버럭 하며 불같이 화를 내고 잘못이라 하면(이것도 내 기준이지만) 용서가 쉽지 않은 성격이 된 데는 내 유년 시절 때문은 아닐까. 부모에게 원망을 쏟아내진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기억을 끄집어 내서 곱씹어 보기는 두렵다. 이런 아빠를 내 아이들도 그렇게 기억하고 원망할지 모르겠다.


113쪽, 고기능 우울증 환자


그가 익숙하지만 끔찍했던 순간이었다는 문장들을 곱씹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우울 삽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때때로 나도 자존감이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뜬금없이 불면의 나날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감각들이 폭죽처럼 동시에 터져 머릿속을 헤집진 않으니까. 그를 이해한다고는 감히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나는 우울을 경험해 보지 못한 걸지도.


"하지만 질문의 화자가 나 자신일 때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나는… 나니까.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어봤자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으니까." 121쪽, 불면


불면을 숙면으로 바꾸는데 술과 수면제를 동시에 사용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그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모든 일에 체념한, 그래서 어찌 되든 관계없는 게 아니냐는 무감각한 표정이. 그가 프롤로그에 자신의 존재를 밝히지 못한다고 밝혔듯 읽다 보면 차마 이런 의사에게 내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게 도박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또 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무섭다.


그는 그의 경험을 통해 독자에게 그냥 '운'이 없어 걸린 것일 뿐일지도 모르는 정신질환을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지난한 과정을 가감 없이 전한다. 한편으로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질병임에도 유독 심한 차별적 낙인을 찍어대는 사회에 대한 절박함 마저 느껴진다. 대부분의 글을 경조증 기간에 썼다지만 글은 한없이 차분하면서 막힘없이 술술 읽혀 더 몰입하게 된다.


191쪽, 다시, 자존감


그리 높지 않은 자존감으로 '척'하며 버티는 일상이라 조금이라도 높여보려면 오늘부터 대답이 좀 더디 돌아 온다고 하더라도 물어야겠다. "두목아, 지금 뭘 하고 싶어?" 라고.


229쪽, 자주 우울한 누군가에게


요즘 복지계에서도 정신보건 쪽이 화두라 정신질환 관련 교육을 좀 듣는 편이어서 정신장애에 관심을 두었다. 정신질환은 한번 걸리면 평생 약을 먹으며 관리해야 하는, 완치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터라 마지막 그의 간절함이 담긴 자주 우울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가 양극성장애를 극복해낸 전사도 아닐뿐더러 관해 혹은 완치를 조심스럽게 기대하는 경험자로서 그리고 의사로서 보다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전하고 싶은 것이라는 동병상련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다.


병식이 생긴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괜찮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으로 많은 자주 우울한 누군가는 많은 위로를 받을지 모르겠다. 그가 공공연하게 커밍아웃 하진 않더라도 의사도 겪는 2형 양극성 장애라면 누든들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희망적이지 않을까. 이렇게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준 그의 용기를 칭찬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