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례력 - 나를 지키는 가장 똑똑한 까칠함
필로소피랩 지음 / 각주 / 2026년 9월
평점 :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어릴 땐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극외향적 인싸였다. 쉰이 넘어가면서부터였거나 아니면 스물하나, 몸이 불편해진 다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근면 성실하게 그냥 배운 대로 살던 대로 사는 게 정답이라 생각했다. 미처 관계에 떠밀리고 있던 걸 눈치를 채지 못했던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점차 나는 관계가 아주 미숙한 사람이 돼버렸다. 이 책의 제목에 꽤나 두근댔던 이유다.
이 책의 저자는 필로소피랩(Philosophy Lab)이라는 철학을 실험하고 가공하는 콘텐츠 연구소다. 시대를 관통해 온 생각을 오늘의 삶에 쓸 수 있는 도구로 풀어 내는 콘텐츠 연구소라나? 아무튼 이들은 위로보다 '판단의 기준'을, 좋은 말보다 '쓸모 있는 말'을 기준으로 독자가 오늘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전 심리 처방을 한다. <초역 명상록>, <초역 자기신뢰>, <번뇌를 종료합니다>를 펴냈다.

저자는 무례에 앞서 거절이 두려운 이유와 함께 '좋은 사람'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인간의 무리에서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종이라는 진화의 유전자에서 기인한다고 말하면서, 이런 진화의 결과는 무리에서 소외되고 떨어져 나가게 되는 일은 생존과 직결된 일이라고 덧붙인다.
이렇게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은 현대 사회로 이어져 '먹고살아야' 하는 직장을 비롯한 모든 관계에서 '거절'로 인한 무리 이탈을 초래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연결된다는 설명은 꽤나 설득력 있다. 사실, 우리는 웬만하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사는 게 속 편하지 않은가.
읽다 보면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한데 하다. "왜 나는 늘 호구가 되지"라거나 "호의를 베풀다가 손해만 보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보통의 사람이 혹 할만한 내용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거절을 배워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주아주 다행스럽게도 저자는 이런 문제의 원인을 '내'가 아니라 관계의 '구조'에서 찾는다. 예를 들면, 호의로 한 번 들어준 부탁이 다음 부탁의 기준선이 되고, 상대는 당신의 배려에 감사하는 대신 '어디까지 요구해도 되는지'를 학습하는 구조를 만든다는 것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지 않은가, 호의를 이용하는 구조라니.
저자는 호구·민폐·빌런·전략적 무례력자, 네 가지 유형으로 자가 진단을 돕고, 거절이 왜 어려운지에 대한 메커니즘을 뇌과학과 심리학을 동원해 설명한다. 이를 통해 독자 스스로 주제 파악을 하게 하고 적재적소에 써먹을 수 있는 실전 대응법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선을 긋고, 갑자기 똑똑한 까칠함을 탑재한 독자와 손절한 이들의 상실감을 다독일 방법도 제시한다. 은근 호구나 거절이 어려운 이들에겐 꽤나 실용적이겠다.
"라면 한 젓가락만 주실래요?"
점심시간, 사발면을 먹으려고만 하면 옆에서 '한 입만'을 거드는 직원이 있다. 물론 친하지도, 그러고 싶지도 않다. 아예 뜯지도 않은 게 있을 때는 하나 주고 말았는데 또 그러니 단칼에 거절했다.
"다른 건 몰라도 먹던 거는 안 준다."라고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 거절하는 순간 식사 분위기는 싸해졌다. 순간 '내가 너무 야박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른 척 씩씩하게 후루룩거렸다.
뭐, 라면 한 젓가락에 그럴 거까지 있나 싶을지 몰라도, 나는 타인과 친함의 밀도를 높이는데 꽤나 시간이 걸리는 타입이라서 누군가 친한 척 밀고 들어오는 태도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게다가 내 쪽에서 먼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더욱더 그렇다.
그런데 이 직원이 그런 사람이었고, 망친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어서 결국 소화제를 먹어야 했다. 저자는 이런 무레에 대처하는 힘을 무례력이라 부르자고 제안하는데 손이 달아오를 정도로 박수 치며 공감했다. 나는 거절하는 데도 근육을 키워야 하는 인간관계가 정말 어렵다.

35쪽
"존중은 구걸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그어 둔 경계의 선명함만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45쪽
인간관계에서 '결계'가 아닌 '경계'라는 의미를 확인시키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타인이 무례하게 선을 넘나드는 꼴을 묵인하는 것보다는 영리한 까칠함이 낫겠다 싶은데, 저자는 그런 독자의 처방을 위해 무례력 검사를 제안한다.
질문은 평소 겪고 있거나 충분히 겪을만한 일들에 대해 묻는데, 검사의 실상은 뜨악,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략적인 무례력자이길 바랐지만, 호구와 민폐 그 어디쯤 위치한 거 같다. 저자는 내게 우울감을 선사했다.
뭐, 빌런이 아닌 게 어디냐는 찰나의 생각이 스치긴 했는데 이마저도 읽고 나니 빌런이 아니라는 건 내 착각일 수도 있겠다. 게다가 저자가 지적하는 악의 없는 선의에 시시때때로 당하다 보니 그의 진단을 그냥 넘기기 어려워 꾹꾹 눌러 읽게 된다.
다름 아니라 몸이 불편해진 이후 민폐형들에게 자주 노출되는 편이다. 거리에선 말도 없이 휠체어를 훅,하고 밀어준다든지, 식당에 들어서면 묻지도 않고 의자부터 치워버린다든지(의자로 옮겨 앉는 게 좋은 사람도 있다.) 같은 선의로 포장된 배려는 일방적으로 자행되는 폭력처럼 느껴져 힘든 적이 꾀나 많았는데 저자의 이런 날 선 지적이 은근 위로가 된다.

"악의 없는 무지가 만드는 가장 이기적인 영향력인 셈이다." 87쪽
이 책이 관계에 취약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은 단순하게 무례함에 대한 성격 분류만 해놓은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런 유형에 대해 대처법을 알려준다는 데 있다. 무례한 사람에게 받은 상처에 대한 처방전으로 충분하다.
"무례력의 출발점은 거절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내 패를 함부로 펼쳐 보이지 않는 것, 바로 평정심이다." 113쪽
또, 저자는 유명 침대 홍보 문구처럼 관계에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 "평정심"이라 강조하는데, 도박판에서 패를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 것이 승패의 지름길이라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관계에서 자꾸 밀려나고 스스로 피로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던 것은 아닐까 깨달았다. 조금만 친절하고 다정한 상대에게는 프로펠러 돌아가듯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며 좋아하는 리트리버 성향이 되니 내가 패를 숨길 수가 있을까.





155쪽, 158쪽
개인적으로 이 책이 관통하는 메시지는 참는 게 능사가 아니고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아닌가 싶다. 무조건 까칠해지라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다정함을 지속할 수 있는 경계를 지켜내는 게 중요하다는 조언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성인으로 충분하고 현대를 사는 동안에는 손해만 보는 사람은 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눈물 나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관계에 허덕이는 사람이라면 강추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