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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할머니의 인생 수업
전영애 지음, 최경은 정리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평점 :
경기도 여주 어디께, 북스테이를 운영하며 괴테 전도사로 힘깨나 쓰고 있다는 다소곳한 할머니의 집을 조망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었다. 당시 소장하던 전 세계 유일한 괴테의 작품 원본도 공개했다. TV를 보면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할머니의 자연친화적인 공간은 휠체어 사용자로 접근이 쉽지 않아 보여 아쉽지만 깔끔하게 포기했었다.
그 할머니의 책이라니 반가웠는데 알고 보니 그간 유튜브 채널 <괴테 할머니 TV>의 영상 중 일부를 뽑아 ‘말’을 ‘글’로 옮긴 내용이라 한다.
'괴테 할머니' 전영애 교수는 서울대 명예교수, 괴테 석학, 괴테 할머니 등 여러 닉네임으로 불리며, 여주에서 여백서원과 괴테마을이란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이 마을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괴테의 명작 전집을 위해 번역에 매진 중이다.
'공부를 마치 나쁜 짓처럼 숨어서 하는 상황'이라는 할머니의 말이 와닿았다. 민주화의 열망이 치열했던 시절에 대학을 다닌 것은 아니지만 그 치열함의 끝 무렵에 걸쳐있던 세대라 학교에 스며든 프락치보다 데모에 나서지 않은 학생들을 혐오의 시선을 내리꽂던 시대였음을 알고 있어서 할머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됐다.
"문학은 누군가의 옆에 가만히 서는 것입니다." 21쪽_배우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사는 것 자체가 경험이고 그 경험이 곧 배움이라는 할머니는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옆 이웃을 만나기도 하지만 수백 년 전의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하면서 삶을 통해 사람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왜 중요한지 일깨워 준다.
이 책이 더 흥미로운 건 괴테에 올인한 할머니의 인생사가 담겨 있는 데다 덤이라고 하기엔 비중이 좀 큰 괴테의 인생사가 툭툭 튀어나오는 게 너무 재밌다.
"도대체 문제가 뭐지?"라는 식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걸 또 정면 돌파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괴테의 단순 무식함은 가히 독보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예컨대 자신의 작품이 비판받자, 비판받을 이유가 뭐지?라며 독일 문학을 있는 대로 독파하고 심지어 독일문학사까지 써버릴 정도였다니 어마 무시하지 않은가. 이런 사례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니 놀라울 수밖에.
근데 파우스트가 60년에 걸쳐 쓴 이야기였어? 언젠가 읽다가 덮어버린 파우스트가 인생에 꼭 한번은 도전해 볼만한 작품이라는 할머니의 말에 책장에서 먼지 폴폴 뒤집어쓰고 있을 책을 찾는다. 큰 사람이 남기고 간 큰 선물이라니, 선물은 풀어봐야 예의가 아닌가. 도전해 볼테다!
그리고 사람이 살면서 무엇을 하는가 보다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조언하면서,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에 두리번거리기만 하는 것보다 하던 것에 집중하는 게 중요함을 일러준다. 다만 집중하되 정도를 걸으라는 할머니의 조언은 마음에 새기게 된다. 방황한다는 건 갈 곳이 있다는 것이라는 괴테의 말도!
39쪽_묵묵히, 계속, 다만 바른길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생존이 삶의 목적이자 명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할머니가 전하는 괴테와 그림 형제의 문학은 삶의 다양한 방식이 있음을 확인하는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혁명의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지식인들이 혁명가로 나서는 대신 문화와 민족 연구를 선택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수백 년이 지난 지금 후손들의 귀중한 보물들을 간직할 수 있었다는 말에 공감한다.
할머니는 '괴테 할머니'이긴 하지만 책에는 할머니가 사랑한 국적을 초월한 작가들의 이야기가 적잖이 담겨 있는데, 그중에 나도 좋아하는 프란츠 카프카도 있고 그림 형제, 헤르만 헤세, 쉴러 등도 등장하는데 모두 흥미롭다. 할머니가 말을 참 잘하신다.
"인간이었으므로 전사였다는 것이 증명이 되지 않느냐"라는 괴테의 시 <삶은 누구에게나 전투 같은 것>이 얼마나 짜릿하던지. 나 역시 인간으로 세상에서 버티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으니 전사이려나. 나중에 천국의 문을 열어 주려나?
그리고 할머니의 부모님에 대한 회상 내용은 가슴 먹먹하기도 했는데 내가 아버지에 대한 옹색한 기억을 안고 살고 있어서 한참이나 멍하게 만들었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을 먹먹히 공감하면서 말이다. 이제 나라도 자식들에게 쓸만한 등을 내보여야 하지 않겠나.
반면 양육에 대한 조언도 눈여겨보게 되는데, 특히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치라고 닦달하면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닦달하는 것을 배우고 이게 심지어 대를 이어 내려간다는 말이 웃프지만 사실이라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133쪽_생에 최고의 날
그나저나 요즘 대한민국의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할머니는 인간 됨을 '선택'이라는 점을 중요하게 꼽으면서 아우슈비츠로 내몰린 유대인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는데, "우리에게는 언제나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즉 좋은 인간이 될 것인가, 나쁜 인간이 될 것인가를 크고 작은 일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라고 했다.
이유가 어떻든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라고 시키는 대통령의 선택이란 그것도 자신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면 분명 나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않을까. 게다가 하는 작태가 수치심도 없어 보여 한심하기까지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괴테의 철학이나 삶 뭐 그런 거를 떠올린다기보다 할머니의 삶 자체나 혹은 그런 태도나 철학 그리고 저 지구 반대편 독일 어디에 있는 바이마르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곳이 할머니에겐 "숨 한 번 돌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곳"이라니, 그런 곳이 있는 게 너무 부럽기도 했다. 나는 이 지구상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지만 언젠가 그런 곳이 만들어지기를 소망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고맙다.
괴테를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이겠지만 그중에 아마 제일 괴테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마음과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는 아주 좋은 인생 나침반이 되는 책이다. 그래서 조심스레 추천해 본다.
덧붙여 괴테 마을이 다 완공될 때까지, 부디 괴테 할머니가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사시기를 함께 응원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