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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버드의 노래 - 흑인, 퀴어, 우아한 탐조자로 살아온 남자의 조용한 고백
크리스천 쿠퍼 지음, 김숲 옮김 / 동녘 / 2024년 9월
평점 :
'흑인, 퀴어, 우아한 탐조자로 살아온 남자의 고백'이란 글귀가 무겁게 내리 누르는 느낌이 있다. 얼추 소수자로서의 고단한 인생이 그려져서 그런 것이겠고, 나도 사회제도에서 얼마쯤은 비켜나 있다는 데서 오는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고.
마블 작가이자 편집자. 마블 최초의 커밍아웃한 히어로 '노스스타'를 창조한 크리스천 쿠퍼는 '요시 미시마', 빅토리아 몬테시' 등 다양한 퀴어 캐릭터를 창조했다. 그리고 새를 사랑해 하버드대학교 탐조 클럽 회장을 맡기도 했다.
2020년 5월,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한 여성에게 겪은 인종차별 을 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DC코믹스 단편 그래픽 노블 <새 It's a Bird>의 스토리를 썼다. 이 책은 그의 이야기다.
사람들을 위협할 수 있는 개가 목줄도 없이 산책로를 배회하는 것을 지적했더니 되레 흑인이 위협한다고 신고 하겠다는 협박을 듣는 일은 어떤 기분일까. 정당한 목소리조차 낼 수없는 이 사회가 정당한 걸까. 그래서 목소리를 거둬버린 소수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런 그의 이야기를 그가 사랑한 탐조의 시간을 통해 관찰해 보라고 한다. 당신은 어느 세상에 있는지, 이제라도 쌍안경을 들어보라고 말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새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고백하는 데 마치 조류 백과사전에나 나올만한 수준으로 신나게 설명한다. 옆에 있었으면 침세례를 받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렇게 한참을 새타령이 이어진다.
뭐랄까, 그의 천재성에 가까운, 아차! 그가 마블의 창작자였다는 걸 잠시 깜빡했다. 역시 그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글은 소름이 돋을 만큼 은유적이면서 직설적이다. 검게 빛나는 깃털을 가진 붉은어깨검정새와 비슷하게 완전히 다른 새임에도 비슷한 이름이 부여된 대륙검은지빠귀 설명으로 피부색이 다른 자신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31쪽, 블랙버드
피부색, 성 정체성에 관해 묵직하면서도 강렬하게 사회적인 메시지를 성토하듯 토해내는 책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름도 생소한 '탐조'의 세계를 유영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한데 이런 새의 다양성에서 건져 올리는 그의 삶은 살아 움직인다. 같은 생명체를 보고 있어도 누군가는 좀 더 넓고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이 와닿는다.
고정관념 그러니까 백인 주류의 삶에서 흑인의 지위가 뒤바뀐 남반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콘트라마노의 경험, '흑인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가 되는 마법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살아온 시간에서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매력적인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이 자신을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는 편견은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확인 같다.
그가 <스타트렉>에 매료되었다던 시절에 나는 TV 앞보다는 어딘가에서 뛰는데 열중하며 에너지를 쏟아내는 편이어서 영상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잘 모른다. 다양한 종이 등장했다거나 피부색이 다른 사람끼리 입을 맞추거나 동성애를 자연스럽게 노출하거나 흑인 여성이 함교 장교로 등장하는 등의 편견을 뒤집어 버리는 것들이 담겨있었다니 시대를 앞선 감독의 인식이 놀랍다.
"인간의 마음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 같다. (…) 아르헨티나에서, 서서히 퍼지는 위협적인 존재는 유대인이다. 호주에서는 아시아인이다. 미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백인들이 흑인을 짐처럼 여겼지만 호주에서 흑인은 그저 아프리카계 미국인일 뿐이었다. 나는 몇 년 후 베를린에서 거주하는 동안 이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터키 후손을 업신 여기는 분위기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 그곳에는 또 다른 '니거'가 있는 것 같았다." 198쪽, 새로운 궤도에 오르다
그의 새와 일상의 탐조를 따라가다 보면 뜻밖의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예컨대 부자지간의 불편함 같은 것들인데 그의 아버지가 맥락 없이 소리를 지르고 화를 쏟아 내는 것들에서 나 역시 주눅 들었던 어린 시절 감정이 불쑥 튀어 나오기도 했다.
이제는 아버지와 여행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지만 과거에도 모든 아버지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 여행은 지치기만 했던 터라 그리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아무튼 그는 즐겁게 탐조하는 팁을 일곱 개나 알려준다.
300쪽, 가족 문제
서아프리카에서 뉴욕으로 이민 온 스물세 살 아마두 디알로는 대학을 가고 싶어 뉴욕에서 2년 동안 양말과 장갑, 비디오를 팔아 9,000달러를 모았다. 그런데 디알로는 집 앞에서 무장한 경찰의 총격에 41발을 맞고 죽었다. 그리고 12년 후 플로리다에서 트레이본 마틴이 디알로처럼 자경단의 총격에 또 죽었다.
이 일로 1,200명의 사람들이 모여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시위를 했고 그 중 누군가 목청 껏 노래를 불렀다. 마치 검은머리솔새, 케이프메이솔새, 적갈색가슴솔새, 아메리칸딱새, 블랙번솔새 등이 부르는 노래와 같이.
인종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시위대의 노래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목소리를 지는 명금류들의 노래는 어쩌면 같은 목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의 표현은 탁월하다.
316쪽, 아빠와 나
그의 이야기는 굳이 차별과 혐오를 거센 언어로 드러내지 않아도 선명하게 읽힌다.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전 지구적 인식의 문제가 지금 여기,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라는 게 씁쓸하다. 생각이 다르고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무섭게 날세우는 혐오의 시대에 꼭 탐독해 봐야 할 책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