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점의 시작
치카노 아이 지음, 박재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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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어쩌다 보니’라는 감정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작가 치카노 아이의 이 책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에서 도모치카상을 수상했다. 작가 소개 밑에 짧은 인터뷰에 실린 ‘이런 삶도 있구나’라는 선정위원 도모치카의 작품평을 보고 궁금했다.


읽기 전에는 'R-18'의 의미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한데 몇 페이지 읽었을 뿐인데 동공도 마음도 머리도 흔들렸다. 더 읽어야 하나? 적당히 보수적이고 고지식해서 호기심과 부끄러움이 뒤엉킨 애매한 감정이 들었다. 이렇게 노골적인 소설이라니, 괜찮을까? 나츠키가 살아있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더해서 내게 기생하던 편견 덩어리들도 피부를 따라 뚝뚝 떨어지고 있다.


“우리는 타인이다. 과거도 미래도 공유하지 않는 오직 ‘지금’만 존재하는 관계다. 그가 나에게 한 이야기나 내가 그에게 한 이야기도 진실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익명의 관계 이기에, 원하면 언제든 끊을 수 있는 관계이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친밀한 타인이다.” 106쪽


소설은 5개의 이야기가 연작으로 이어진다. 나츠키로선 충격적인 사건, 엄마의 직업과 그로 인한 가장 친하다고 여겼던 친구 쇼의 멸시를 한꺼번에 받아들여야 했던 어린 시절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유도 모른 채 아빠의 사랑이 식어버린 어릴 때의 기억으로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다 밤의 세계로 숨어든 유이의 이야기로, 또 친한 친구의 엄마와 성매매를 해온 아빠의 일을 알아 버린 쇼의 이야기, 그리고 시간이 흘러 모두 성인이 되고 우연히 쇼와 재회한 후우카의 이야기가 각 인물을 중심으로 밀도 있게 연결된다.


솔직히 엄마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츠키의 심리적 변화에 몰입했다가 성인이 된 그의 직업을 보고 혼란스러웠다. 나름 반전이었달까? 아무튼 읽다 보면 자연스레 응원하게 된다. 제발 리코와 사귀라구! 처럼.


떳떳하지 못하다거나 더럽다거나 세상과 연결되는 게 두렵다거나 같은 감각들로 표현되는 이야기들을 호기심이나 기대감 같은 감각들을 가졌다는 게 일순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숨 쉬는 걸 잊을 만큼 몰입하다 보니 목구멍이 건조해져서 자꾸 잔기침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이 왜 'R-18' 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왜일까요? 취미일까요?' (중략) 그렇게 말하면 성매매도 그렇고, 유튜브나 인생도 다 취미예요. 하지만… 성매매 업소 일을 하는 여성이나 유튜버나 다른 사람들이나 다들 열심히 살잖아요.'" 225쪽


성매매가 불법인 나라에서 합법인 나라의 '즐기는' 혹은 '배설' 정도의 구매자의 인식을 이해하기란 분명 얼마간의 괴리가 있다. 또 한편으로 마음 둘 곳 없는 남편들의 외로움을 위로하고 있다는 판매자의 인식 역시 불편할 수도 있다. 또 그와는 다른 감각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일 수도 무작정 부끄러운 것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양지와 음지 카드를 꺼내들고 정치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느 쪽이든 개인적으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가까우려나?


253쪽


하지만 작가는 자본주의 세상이 지배하는 이 불평등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일'은 어떤 이유로든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는 고민과 철학이 담아내려 애쓰는 것 같아서 읽는 내내 가슴 벅찼다. 유리문 안이든 밖이든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저 '파격적 소재, 신선한 감각'이란 표현으로 이 책을 다 담을 수는 절대 없겠다. 강추한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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