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서사 - 수많은 창작물 속 악, 악행, 빌런에 관한 아홉 가지 쟁점
듀나 외 지음 / 돌고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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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판 콘텐츠인가 싶을 정도로 '악인'이 판치는 세상이 됐다. 그러니 악인의 정의가 새삼 궁금했다. 작가, 평론가, 연구자, 번역가에 비평가로 구성된 9인의 저자가 콘텐츠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악인을 파헤치는 이야기가 사뭇 기대 됐다.




본 내용에 앞서 등장한 <편집자의 말>은 논문의 초록을 보는 것처럼 이 책의 엑기스를 쭉 뽑아 압축 요약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읽기 쉽지 않은 딱딱한 내용이겠다, 싶은 예감이 들었다. 사실 논문은 읽고 공감하기 쉽지 않은데.


"'영화는 영화로만', '코미디는 코미디로만' 같은 말들은 비겁한 거짓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던진 모든 것인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 24쪽, 악인보다 선인의 이야기에 집중할 것


공감한다. 아주 많이. 작가의 이야기는 우린 어떻게든 타인과 연결되어 세상에 존재하는데 그게 '아니면 말고' 식의 어떤 소모적인 표현쯤으로 치부되는 건 위험하다. '개그는 개그일 뿐'이라고 외치며 정치 탄압을 피하고자 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를 만큼 그 이면에 존재한 의미를 곱씹게 된다.


영화평론가 전승민은 그의 글에서 악이 부재한 상황에서 선의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덧붙여 텍스트로 이루어지는 악이 부재한 세상은 과연 유토피아이며, 인위적으로 그렇게 만드는 것은 결국 위선이 아니냐 묻는다. 솔직히 악이 존재하지 않다 해서 선이 가득할 것이라곤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빛을 위해 어둠이 존재한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존재로서 각기 드러나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콘텐츠 속에서 내리는 악이라는 정의 속에만 악은 갇혀 있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분명 콘텐츠에는 독자나 시청자가 있고 그 세계를 들여다보는 현실에는 다양한 이상 동기를 가진 이들의 존재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 않은가.


80쪽, 조명등, 달, 물고기


이어 강덕구는 <나쁜 놈도 눈물 흘려야 할 이유>에서 서부극과 다큐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악'에 대해 "악인에게 서사를 지운다는 것은 그의 얼굴을 지운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얼굴을 빼앗긴다.(169쪽)"라는 주장을 담는다.


물론 콘텐츠라는 허구의 세계(허구의 세계로 단정하기엔 현실에서 등장하는 악인의 존재가 비일비재 하지만)에서 선을 드러내기 위해선 악이 필요하지만 현대에서 악인의 묘사는 잔인함의 강도가 도를 넘어섰는데 이를 억눌린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는 포장은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의 착각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순간 스릴은 없고 잔인함과 공포만 극대화 하고 있지 않은가.


215쪽, 현실의 낙인, 무대 위의 매혹


아홉 명의 저자들이 말하는 '악'과 '악인'이 펼치는 서사에 대해 내가 대부분 이해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저자들의 열띤 논점의 기저에는 악인임에도 가져야 하는 '인권'에 대한 담론을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쇄 살인마도 인권이 있는가, 같은 질문들.


이 책은 콘텐츠 속 잔혹한 연쇄 살인마의 얼굴을 한 악인부터, 여성성에 대한 차별 혹은 배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빌런의 속성 같은 다양한 악인을 다루고 있다. 저자들은 악인의 편을 들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텍스트나 미디어에 노출되는 악인의 서사를 배제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거나 혹은 그래서 속이 상할 수 있는 지점들을 저자들은 지적하는 게 아닌가, 라는 정도로 이해했다.


책장을 덮는 순간, 타고 나든 성장과정에서 만들어지든 악인은 악인일 뿐이라는, 거기에 서사를 입히는 순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분명한 건 환경이 똑같아도 악인이 되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더프 백더프의 말처럼 악인 그 자체는 그의 선텍일 테다. 악인의 서사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공감한다.


'악'에 대한 심도 있는 학술지를 읽은 듯 하지만 나름 악을 구분하는 수준은 살짝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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