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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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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간(師弟間)의 인연이 두 가문의 관계로 이어진 도타운 우의(友誼))
                                                                            -‘삶을 바꾼 만남을 읽고-

한양대 국문학과 정민 교수의 저서로 다산이 유배지 강진에서 만난 황상과의 사제(師弟) 간의 정을 그린 삶을 바꾼 만남을 읽기 시작하다. 201112월에 초판 발행에 20145월 초판 12쇄판의 구입이었다.

 

나는 책을 선택할 때 저자에 비중 둔다. 한문학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 방면의 전공자였는지를 보고 학계의 정평을 얻은 저작이 있는지를 살핀다. 정민 교수는 그 방향의 글을 재미있게 엮어 젊은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것 같았다. 그리고 최근 저작의 동향을 살핀다. 정민 교수는 현대시학의 연재 글을 보충하여 한시 미학 산책이란 책을 낸 이후 인기작가 반열에 오른 듯하다. 이제 생명이 다해 전공자 아니면 주목을 받지 못하던 한시를 동서고금의 문학 이론과 예화를 소개하며 재미있게 소개했다. 그리하여 하물며 어린이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로 한문학에 입문하는 초학자에게도 권할만한 책이었다. 조선 중기 권필이란 문인을 추적하더니 그 후 18세기 학자들의 탐구한 이야기를 내어 재미있게 읽었다. 한창 다산의 학문적 업적을 천착하더니 19세기의 추사와 초의 다산의 제자들로 연구의 폭을 넓힌다. 지난번 이 책보다 뒤늦게 나와 읽은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이란 책을 구하면서 같이 입수한 책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정약용의 강진 유배 18년 동안 제자가 수없이 많지만 이들 중 끝까지 진심으로 스승을 한결같이 교류하며 섬긴 제자는 황상(黃裳‘1788~1870) 한 사람뿐이었다는 사실이다. 180111월 다산 일가는 나주에서 흑산도로 유배가는 형 약전과 헤어져 다산의 유배지 강진 고을로 향한다. 다산은 서문 주막집에 들른 것이 주막 봉놋방에 눌러앉은 것이다. 유배 온지 1년만인 180210월 적막감을 덜 겸 서당을 열어 자주 들르는 안면이 있는 아전들의 자식들을 받아 가르친다. 그 중 질박하고 명민한 황상이란 아이를 남겨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 때 다산이 준 가르침이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 하라란 삼근계(三勤戒)를 받는다. 서당이 있는 집을 사의재(四宜齋)라 하고 여러 제자들을 받아 길러내나 끝까지 제자의 도리를 다한 사람은 황상 형제와 저작에 많은 도움을 준 이청이 있으나 이청은 마지막 스승과 개인문제로 틀어졌다. 황상은 다산 밑에서 낡은 학습방법을 물리치고 다산 스스로 개발한 대안의 새로운 방법으로 기초를 익히고 우리 역사책도 곁들여 학습케 했다. 끊임없이 초서(抄書)하고 메모하게 하며 황상 형제는 문예를 공부하여 일정 수준이 오른 뒤에는 일과를 주어 이들의 작품에 평을 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특히 다산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애절양(哀絶陽)은 황상이 1803년 봄 칼로 제 남근을 잘라버린 참혹한 사건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해 아전의 포악을 고발한 내용의 시를 다산이 보고 공분을 느껴 다시 지은 시로 당시 시대상과 위정자의 심각한 반성을 요청하였다. 학질의 고통을 앓는 제자에게 학질이 뚝 떨어지라고 지어준 시에 보답하는 시를 보고 다산은 중국의 사혜련(謝惠連)의 설부(雪賦)에 부끄럽지 않은 시라고 격려하였다. 그렇게 안정적 삶을 일군 다산과 황상은 대둔사의 학승 아암 혜장과 교류를 갖고 근친을 온 아들 학연과 서간을 통해 황상과 문예의 교류는 자연적 이어진다. 그리고 무료한 유배생활의 활력소로 채마 밭을 가꾸는데 다산답게 제자들에게 선진적 영농, 양계의 방법을 파급시킨다.

1804년 가을, 다산은 동문 밖 주막을 떠나 제자 이학래의 집 묵재에서 1년 반을 보냈으나 그 때 남은 기록은 없다. 이학래는 스승의 작업에 끝까지 조력하지만 과거에 집착하여 끝내 뜻을 못 이루어 스승 떠났고 비극적 말년의 생을 마감한다. 황상의 아버지 황이담은 이름난 술꾼으로 살아생전에 취옹재기를 지어 주기도 했고 봄 술병으로 세상을 떠 유언대로 간략하게 처리 한 황상을 나무라며 두 달 동안 시묘살이를 하도록 최소한의 예를 차리도록 한다.

황상은 초야에 숨어 사는 유인(幽人)의 삶을 동경해 다산에게 묻자 주역을 인용하여 대답한대로 격에 맞게 구현해 내어 스승을 흡족하게 한다. 1808년 봄 다산은 귤동(橘洞)의 외가쪽 먼 친척 윤종하 소유의 산정(山亭)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옮겨 경영을 시작하여 꾸민다.

 

180111월 강진에 내려간 다산은 1810년 장남 정학연의 격쟁(擊錚)으로 곧 사면되는 줄 알았으나 방해세력의 집요한 공작으로 막상 해배 명령서는 8년이 지난 18188월이었다. 그간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두 아들을 포함 18명이 모여 선생의 해배소식을 축하할 겸 십시일반 계금을 갹출하여 다신계를 조직한다. 그 후 초기 읍내 제자6명이 추가로 가입하고 스님 제자들도 전등계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나 다산과 과거에 도전하여 입신양묭 하려는 제자들을 도와주지 못한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1830년대 중반 흐지부지 되고 만다. 황상은 유인(幽人)의 삶을 살 것을 결심하며 선생의 가르침대로 살 것을 약속한다. 또 다산은 다산초당에 거처할 때 살림을 도와 줄 후처를 들인다. 그사이에 딸이 있어 홍임 모녀라 불렸다. 그러나 해배 후 마재 본가로 따라 갔으나 잘 적응치 못하고 강진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사연을 다산이 지은 것으로 추축하는 남당사(南塘詞) 16수가 전한다.

그 후 황상과 다산과의 연결 서신이 나타나지 않으나 182812월 스승이 다녀가라는 간곡한 편지를 받는다. 18362월 중순 스승의 회혼연과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마흔 아홉의 제자는 일흔 다섯의 노환중의 스승을 여흘넘게 걸어 마재의 스승 부자를 방문하여 극적으로 만난다. 그러나 바로19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서울에 들러 잠깐 구경하며 고향으로 내려가던 참에 스승의 서거 소식을 풍문으로 듣고 다시 마재로 향해 장례의 모든 절차를 자식처럼 상복을 입고 지켰다.

 

10년 후인 18453월 황상은 두 번째 상경 마재를 방문하여 정학연과 반갑게 만난다. 정학연의 제의로 두 집안 간 우의를 이어나가기 위한 정황계를 맺기로 하고 계안에 집안 자손을 기록하고 두 집안 후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신의를 맺고 우의를 다지는 계로 삼고자 한다. 이에 정학유와 황상은 더욱 우의가 돈독해져 함께 송도기행을 다녀오며 정학연의 소개로 황상은 장안의 주앙 시단 명류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황상의 시를 보고 높이 평가한 사람은 추사 김정희였다. 정학연을 통해 시격을 알고 있는 추사는 184812월 초 추사가 제주도에서 해배(解配)되어 상경하는 길에 강진 백적동으로 황상을 찾았으나 아쉽게도 황상이 세 번째 상경차 두릉으로 막 올라간 직후였다. 서로 만나 시평을 듣고 인정받고 싶었으나 길이 엇갈려 회면은 몇 년 뒤로 미루러진다. 18494월 황상은 정학연의 편지를 전할 겸 대둔사로 초의 스님을 찾아가 우의를 다진다. 그때 오늘날 까지 추사의 명품으로 잘 알려진 명선(茗禪)과 죽로지실(竹爐之室) 두 작품을 감상한다.

 18539월 가을걷이를 끝내자 네 번째 상경을 결행하여 추사를 꼭 만나리라 다짐한다. 이듬해 3월까지 근 반년동안 머물렀던 황상은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즉 과지초당에서 추사와 형제들을 만나고 당대 최고 명류들과 수작하게 되어 기꺼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같이 다산 밑에서 공부한 이학래가 과거에 실패하고 허름한 차림에 실의의 모습으로 추사의 식객이 되어 떠도는 것을 보는 슬픈 해후도 한다

 18558월 다섯 번째 마지막을 상경하여 1856년 봄에 낙향할 때까지 추사형제의 서문을 받는 등 인가를 받고 기뻐한다. 그러나 자신을 아껴준 지인들의 세상을 하직함에 한 시대를 마감하는 비감에 젖는다. 황상은 18701222일 여든 세 살을 살았지만 지음들이 떠나자 득의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지은이가 퇴고할 무렵 만년 10년간을 채워줄 치원소고가 발견되어 시가 무려 315365수나 된다니 죽을 때까지 초서하며 시를 지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처음과 끝을 이렇게 한결같은 지킨 사람은 드물다. 이런 인물을 발견해 인생의 길잡이로 안내케 한 옛사람의 뜻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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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 -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 조선 문명의 힘 2
박철상 지음 / 너머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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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好樂齋 > 秋史와의 交感


박철상 선생의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을 읽고 

  80년대 초반 30대 초등학교 교사였던 나는 어릴 때부터 꿈꾸어 왔던 서예를 본격 배우기 시작했다. 한글서는 학교에서 필요하여 자주 쓸 기회가 있었으나 한문서는 처음 배우는 것이라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를 쓴 정주상 선생 서실에 인연이 닿아 배우고 있었다. 근무하는 위치가 마포에 있었기 때문에 5시에 퇴근을 하면 서실이 있는 종로2가의 견지동을 향한다. 그런데 광화문에서 버스를 내린다. 세종문화회관 지하전시실에서는 매일 크고 작은 전시회가 열리기 때문에 여러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시장에 들르지 않을 때는 책을 좋아해 교보문고에 들러 신간이나 고서의 영인본을 둘러보고 책장을 뒤적이는 것이 하루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서예는 글씨를 잘 써야 하겠지만 이론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시간 나는 대로 서점이나 문고에 들러 이것저것을 살펴보며 전문서에 관심을 가졌다. 것이다. 특히 역사부문에 관심이 많아 그 분야의 책을 훑어보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 지하 진열장 한적한 한쪽에 위치한 고서 영인본이 꽂혀있어 그곳에 주목하였다. 그곳은 아세아문화사에서 나온 책들이 대부분인데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고산(孤山), 송강(松江), 노계가사(蘆溪歌辭)’,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등이 내 서재에 꽂혀 있다. 그 책들은 그때 한 권 한 권 구입한 책들이다, 아직 한자를 한참 공부하던 시절이라 잘 이해는 되지 않았으나 틈나는 대로 꺼내어 이해의 폭을 넓이는 편이었다.

  인터넷의 서점을 검색하던 중 박철상 씨의 새로운  저작이 소개 되었다. 박철상씨는 최근 한문학계의 주목을 받는 분으로 전통학문의 자료인 한적을 많이 수장한 분으로 그것을 바탕으로 추사 김정희 활동에 주목하고 그에 관한 저작 세한도(歲寒圖)’를 내놓았다. 전통학문에 관심이 많고 추사 연구에 주목하는 나 또한 관련저작이 나오면 사 보는 편이다.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 다녔다는 책의 제목은 추사의 대련작품에서 뜻을 옮겨와 정한 듯하다. 특히 추사의 금석학활동에 주목하여 탐색한 내용이었다,

  필자는 추사 김정희 이전의 금석학활동 중 왕실 중심의 각첩을 제작하여 사용했는데 안평대군의 비해당집고첩을 시작으로 신용개의 해동명적이후 임진왜란 이후 이후원의 금석록과 조속의 금석 청완낭선군, 낭원군의 대동금석서김재로, 유척기의 금석록이 제작되었고 박지원은 삼한총서는 하나의 편집된 금석록이 있었다. 즉 고증보다는 탁본이나 자료를 모아 편집하여 감상적 측면이 강하였다. 김정희 금석학은 사신들의 연행으로 청나라 문사들과 교류가 늘어나자 탁본을 요구하고 한반도 금석에 관심을 갖는다. 김정희를 중심으로 금석학은 역사고증 및 서법고증에 괄목한 성과를 거둔다. 이 시기 학자들은 역사 고증과 서법 고증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학문으로 체계화 하였다고 보고 있다.

  유득공은 금석문을 단순히 서법의 전범이 아니라 본격적인 역사연구의 보조자료로 활용한다. 그의 저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시집이지만 발해고사군지는 역사책으로 금석문을 사료로 삼아 선학 연구가 있으므로 김정희의 금석학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1809년 연행을 통해 옹방강, 옹수곤 부자와 완원의 교유를 통해서 그들의 가르침은 김정희 금석학 성립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그 이후 1816~1817북한산진흥왕순수비를 답사 고증하고 경주답사를 계기로 금석문 발굴과 연구는 절정에 이른다. 특히 아들인 옹수곤은 적극적으로 조선의 탁본과 사료를 연구하였으나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동학 유희해의 해동금석원과 연계된 것은 다행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의 연구 성과는 청나라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청의 학자들이 조선의 금석문을 연구하는 기틀이 되었으며 조선의 문화에 관심을 갖게 했다. 또 추사의 연구 자료는 끼리끼리 공유되고 후학들은 오히려 중국의 자료에 의존하는 결과를 가져 와 아쉬움이 남는다.

  추사 김정희의 저작으로 알려진 예당금석과안록은 추사의 종합적인 금석학 연구 성과라기 보다 진흥왕 이비고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보이며 경필 필사본 형태로 전하여 일제 강점기 일본학자들의 복사본으로 보인다. 그 책에 수록된 내용은 추사의 저작이확실하다. 그중 해동비고목록을 보면 <평백제비>, <당유인원비>, <경주문무왕비>, <진주진감선사비>, <문경지증대사비>, <진경대사비>, <경주무장사비> 모두 7편이다. 이는 한국 금석문 연구사의 이정표가 되는 저작이라는데 있다.

  추사 김정희는 금석학을 학문으로 정립한 인물인 동시에 추사체를 창조한 서예가이다. 그의 서법에 관한 글은 편지 글 외엔 남기지 않았다. 저자는 추사체가 금석문을 연구하면서 탄생한 서체라는 논리를 편다. 중국의 스승 옹방강, 완원의 영향 그중 완원의 남북서파론북비남첩론에 이은 예유남북론의 영향으로 또는 한예(漢隷)’의 고증으로 그의 제자 조면호는 추사 예서는 당대의 비판에 적극 대응해 최고의 글씨임을 주장한다. 이는 금석학의 서법 고증으로 추사체가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책을 통해서 우리나라 금석학의 연원과 추사 선생의 서법 외적인 금석학 연구의 열정을 알았으며 아직 젊은 서예가를 중심으로 금석학을 연구하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뚜렷한 성과가 없음을 아쉬워하며 성과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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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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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기 일본편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를 읽다)

 나는 유홍준의 문장을 사랑한다. 그의 인문학적 교양과 지적 편력을 사랑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나오기 전 고미술에 관심을 가지면서 유 교수의 미술사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라면 미술평론집도 구해 읽었다. 우선 그의 문장은 쉽다. 처음 평론책을 대하면 머리부터 아팠다. 복잡한 외국 학자들의 난해한 이론들을 끌어들여 설명하는데 유교수의 정직한 관객이나 다시 현실의 지평에서를 보면 일본강점기시대 작가나 광복 후 민중미술계열작가들의 평론에는 친근감마저 든다. 그래서 그런지 학자들은 그의 문장이 쉬운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학술 서적이 그렇게 쉬워서 되겠냐고. 그러나 쉽게 글을 써서 누구나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대중화 의 길이 쉬운 일이 아니다. 가까운 예로 우리의 문화재를 설명한 글들을 보라. 누구나 쉽게 다가가 읽고 이해하면 얼마나 좋을까만 특히 전통 건축용어에서 어려운 전문용어와 부딪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나의문화답사기를 여러 번 읽고 현장 답사를 한 적도 있다. 특히 답사기 1권을 읽고 강진에 들렀을 때 다산초당이나 영랑생가’, 무위사 등을 답사하며 문화재 속에 배어있는 인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음에 감동을 느꼈다. 저자도 현장답사를 3~4회 이상 실시 한 다음 답사기로 옮겼다고 실토한다.

사실 우리는 이웃나라인 일본을 웃습게 여기고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다. 어디서 그런 뱃장이 나왔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일본에게 역사상 14C 임진왜란과, 근현대의 일제침탈 362번의 크나큰 피해를 입으면서 그들에게 저항해왔다. 이는 저도 모르게 핏줄로 이어진 감정이 아닐까. 우리 민족은 일본에게 싸워서 지면 안 된다는 결의가 배어있다. 특히 지금은 덜 하지만 스포츠경기에서 지면 안 된다는 것이 철칙처럼 되어있어 출전 선수가 겁에 질려 싸워 보지도 않고 긴장부터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쟁심리가 은연중 이제 일본인에 대해 우습게 아는 심리로 자라 자만심을 키운 건 아닌지. 그러나 이런 경쟁심리가 일본의 높은 기술과 경제를 바짝 추격하는 요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일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쓸모없는 허장성세의 태도가 아닌가. 일본은 고우나 미우나 가장 가까운 이웃이 아닌가. 가장 가까이 있는 일본을 모르고 세계로 나가겠는가? 저자는 서문에서 일본인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현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라고 썼다. 탁견이다. 저자는 이런 콤플렉스의 색안경을 벗어던지자고 주장한다. 그래서 새로운 세대들을 위해서 이 책을 쓴다고 했다.

 내가 소일의 중요한 일 중 세상과 소통하는수단으로 불러그를 중시 여기는데 그 중 세계여행을 다녀와서 올리는 풍정사진과 등산마니아로서 트랙킹 여정 중 일본의 명산과 이름난 곳을 자주 다녀와 소개하는 안나푸르나님의 안내는 상세하기가 등산, 트래킹 전문가들보다 더 세밀하다. 자주 대하는 일본의 기사 중 가장 부러운 것이 잘 정돈된 자연과 주변 환경이다. 마치 우리가 일본의 일상문화를 많이 따라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우선 답사기를 들여다 보자. 일본편 1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규슈로 주제가 빛은 한반도로부터라는 23일의 여정이다. 2300년 전 벼농사를 갖고 규슈로 건너와 일본 열도에 야요이(彌生)시대를 개척해가는 도래인(渡來人)들을 증명할 박물관 토기를 위시한 유물들을 돌아본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 이곳에 끌려와 일본에 도자기 혁명을 일으키고 세계도자시장을 재패한 아리타야끼(有田燒)를 연 이삼평(李參平?~1655) 도조(陶祖), 사쓰마야끼(薩摩燒)를 이어가느 심당길(沈當吉)의 후손 심수관(沈壽官), 처음은 도공으로 출발했으나 일본의 성()을 사 현달한 박평의(朴平意) 후손 박무덕(東鄕茂德,1882~1950) 등 우리 도공들과 그 후손들의 수고로운 자취를 살펴보았다.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한 백제유민들이 수성과 대야성을 쌓고 나당연합군을 대비한 자취도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규슈는 인재(人才)의 산실이었다. 가고시마는 이런 일본을 이끈 인재들을 현창(顯彰)하는 것이 참 부러웠다. 규슈의 가고시마를 중심으로 유신의 고향이라 하여 186515명의 젊은이들을 영국에 유학을 보내 선진문물을 배워 근대화의 역군이 된 인재들의 동상들, 유신의 삼걸의 한사람인 오쿠보 도시미치. 마지막 사무라이라고 칭송받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소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큐슈 출신으로 일본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의 숭배는 넘치는 민주화이 이름으로 개인숭배를 배척하는 우리나라 풍토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런 유적은 우리 후손들에게 선각자들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는 교육적 뜻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한반도로부터 끊임없는 문명의 빛을 받아 고대국가로 가는 기틀을 마련한 일본의 큐슈지방의 유적을 더듬으면서 지금도 끊임없이 진실을 왜곡하려는 일본 상층부의 어리석음을 보며 이제 기대할 곳은 일본의 양심있는 국민들이 아닌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가까워진 이웃 국민과 국민 사이 더 많은 교류가 이루어 져 왜곡의 벽을 깨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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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6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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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교류사 자료를 발굴 정리한 정민 교수의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내가 한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민 한양대 교수의 저서에 관심을 가진지는 오래되었다. 옛 한적으로 남은 고전을 현대인이의 입맛에 맞게 맛깔스럽게 풀어내는 재주가 비상한 학자의 출현은 우리 독서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정교수가 쏟아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고 각 일간지의 독서란에 소개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그의 첫 저서를 대한 것은 그의 역작 <한시 미학 산책>이다. 500여 페이지에 두툼한 책으로 시 전문 월간지 현대시학24번에 걸쳐 연재한 글을 모아 낸 책으로 그는 서문에서 효용가치가 다한 한시를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어 현재적 의미를 밝힌다고 했다. 아마 정교수는 시단에 등단한 시인이기도 했기에 이런 연구 작을 내어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의 글 행간엔 치열한 학문에 대한 접근과 한문학에 대한 기초가 튼튼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선조들이 남긴 한적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옛것의 숨은 지혜를 속속들이 파헤쳐 안내하는 그 속에 무궁무진 것이 들어있을 것 같다.

 그 이후 정 교수는 18세기의 걸출한 작가들의 문집을 중심으로 박지원, 이덕무 등 백탑파들의 문집과 활동을 들여다 보았으며 많은 저서를 남긴 다산의 제자들과 교류와 강학활동을 파헤쳐 저작으로 남겼으며 강진의 선비, 황상도 그때 발굴한 인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해남의 초의선사를 천착하여 우리의 차문화의 연원을 정립하였고 초의선사의 지기(知己) 추사의 활동을 추적하고 다시 18세기로 넘어와 우리 지식인들이 청조문화와 어떤 교류활동이 이루어졌나를 추적하였다. 우리 한중 지식인의 교류활동은 먼저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추사 애호가이자 선임 연구자인 경성제국대하교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의 자료를 추적하였다. 그 과정을 정리하여 책을 내 것이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문학동네, 2014.5.)이다. 이 책은 700쪽이 넘는 두께와 긴 글로 20145월에 출판되어 바로 구입하였으나 꾸준히 읽지 못하고 띄엄띄엄 읽다 리듬을 잃었으나 완독은 하였다. 지난 3월에 이 저작의 공으로 정교수는 제40회 월봉 한기악 저작상을 수상하기도 한 책이다.

  저자는 20127월 하버드대학교 엔칭연구소 방문학자로 초청받아 엔칭도서관과 연구실을 오가며 한 번도 대출의 손을 타지 않은 듯한 고서와 자료를 복사와 메모로 정리해 나간다. 그것은 뜻밖의 엔칭도서관이 소장한 후스쓰카 지카시가 모은 구장(舊藏) 도서였기 때문이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20세기 초 중국 청대의 학술을 연구하다가, 조선의 지식인에 푹 빠졌었다. 그가 조선에서 필생의 의욕을 쏟아 수집했던 자료를 일본으로 가져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국보 세한도(歲寒圖)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이 곡절 끝에 다시 미국대학의 도서관으로 흘러들어온 지 60여년 세월 만에 이제 제 임자를 만난 것이다. 그 자료는 후지쓰카의 손을 거쳐 일부 소개되어 세상에 알려진것도 있지만 미쳐 손을 대지 못했거나 모으기만 하고 미쳐 음미되지 않은 자료가 훨씬 더 많았다. 이제 그 자료를 통해 정민 교수의 노력으로 세상에 발표된 것이다. 그는 18세기뿐 아니라 19세기 한,,일 지식인들의 교류와 소통의 연구로 확대해 가고 싶어 한다. 이제 그 주요 내용으로 가보자.

  제1화는 후지쓰카 지카시 컬렉션과의 만남이다. 과천시는 추사가 말년을 지낸 곳이다. 뜻있는 과천의 문화인들은 추사에 관한 자료를 모으는데 힘을 기울였다. 추사에 관한 연구와 자료수집을 알고 있는 관계자는 후지쓰카 지카시의 아들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 1912~2006)를 일본으로 찾아간다. 자료를 잘 보관하겠다는 과천시 관계자들의 믿고 1945년 도쿄폭격으로 방공호에서 살아남은 자료들과 묵적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 이후 과천시는 추사박물관을 설립하여 기증자의 높은 뜻을 기려 정기 전시회를 통해 자료를 수차례 공개한 것으로 안다. 이 전시회를 다녀온 정교수는 후지쓰카의 수집한 자료와 묵적이 화물칸 몇 량을 가득 채우고 남을 많은 양이 있음을 간파한다. 엔칭 도서관에 들어간 정교수는 원고지에 펜으로 작성한 원고를 보며 망한려용전(望漢廬用箋)이란 후지쓰카 지카시의 전용 원고지임을 알게 된다. 망한려(望漢廬)북한산이 바라뵈는 집이란 뜻으로 후지쓰카의 서재이름인 것이다. 도서관에 오기 전 엔친도서관에 후지쓰카의 자료가 있다는 말을 풍문으로 들었겠다 쾌재를 불렀다. 1화는 <철교전집>의 필사본이다. 철교란 엄성의 호로 엄성(嚴誠,1732~1767)은 홍대용이 북경에서 사귀어 필담을 나눈 절강성에서 과거 시험을 보러와 만나게 된 한중지식인 교류에 물꼬를 튼 분이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독특한 개성이 있는 이물이다

2화는 철교전집과 함께 열람한 책이 이다. 2화는 절강향시주권에 얽힌 사연이다. 중국 절강지역에서 실시한 향시 답안지다. 홍대용과 교유를 나눈 육비(陸飛, 1719~?) 엄성, 반정균(潘庭筠, 1742~?) 이 세 사람의 1765년 치러진 답안지로 육비가 1, 반정균이 21, 엄성이 60등으로 모두 회시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그때 홍대용 팀의 정사를 맡은 순의군이 기념으로 가져온 것이 자료에서 발견된 것이다.

  홍대용은 건정동 필담에서 북경의 유명한 서점 거리 유리창에서 절강성에서 회시를 치러 북경에 온 엄성, 반정균, 육비와 사귀게 된 내용을 소개한다. 엄성도 日下題襟集에서 같은 만남에 대해 따로 기록한다. 1766126일 우리 측은 비장 이기성이 안경을 사러 유리창에 나갔다 우연히 마주치어 인연을 갖게되고 함께간 홍대용은 그 사연을 듣고 23일 건전동으로 엄성과 반정균이 머부르는 객점을 찾아가 필담을 나누며 교제가 시작된다. 그 후 엄성은 낙방하여 낙향했고 2년후 풍토병을 사망하나 10년 후 뒤 늦게 도착한 부고를 보고 애도하고 초상화를 요청하여 받았다. 엔칭도서관에서 우연히 묵림금화(墨林今話)란 고서를 펴보고 홍대용이 사귀었던 엄성과 육비에 대한 후일담이 기록 되어 소개하였다. 이 책은 이 외에 엔칭도서관에서 발굴한 자료를 토대로 홍대용과 만나 우정을 나눈 청의 학자와 사귐 유금과 이조원의 만남, 완당의 인보에 관한 이야기, 한객건연집이 중국에서 인기있었던 일,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강세황 등 18세기 청의 학자들과 교류한 주인공들의 뒷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 하며 말한다. ‘후지쓰카 지카시! 끝으로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러야겠다. 나는 지난 1년간 일거수 일투족을 그와 함께 했다. 그의 흔적을 찾아 헤매면서 늘 부끄러웠고 자주 주눅이 들었다. 그는 내게 머리로 하는 공부, 가슴으로 하는 공부 말고 몸으로 하는 공부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했다. 사실 그는 찾아놓기만 하고 제대로 된 연구를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8세기 문예공화국이 우정과 친교의 장이었다면, 19세기는 학술과 문화의 장으로 펼쳐졌다. 동아시아 학술은 이 같은 접촉을 통해 상호 존중의 정신이 작동되고 있었다. 가능성을 꿈꾸며 새로운 지적 커뮤느티,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문예공화국의 장대한 꿈을 되살려 보고 싶다.’ 박수를 보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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