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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ㅣ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기 일본편Ⅰ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를
읽다)
나는 유홍준의 문장을
사랑한다.
그의 인문학적 교양과 지적 편력을
사랑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나오기 전 고미술에 관심을 가지면서
유 교수의 미술사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라면 미술평론집도 구해 읽었다.
우선 그의 문장은
쉽다.
처음 평론책을 대하면 머리부터
아팠다.
복잡한 외국 학자들의 난해한 이론들을
끌어들여 설명하는데 유교수의 ‘정직한 관객’이나 ‘다시 현실의
지평에서’를 보면 일본강점기시대 작가나 광복 후
민중미술계열작가들의 평론에는 친근감마저 든다.
그래서 그런지 학자들은 그의 문장이
쉬운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학술 서적이 그렇게 쉬워서
되겠냐고.
그러나 쉽게 글을 써서 누구나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대중화 의 길이 쉬운 일이 아니다.
가까운 예로 우리의 문화재를 설명한
글들을 보라.
누구나 쉽게 다가가 읽고 이해하면
얼마나 좋을까만 특히 전통 건축용어에서 어려운 전문용어와 부딪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나의문화답사기’를 여러 번 읽고 현장 답사를 한 적도
있다.
특히 답사기 1권을 읽고 강진에 들렀을 때
‘다산초당’이나 ‘영랑생가’,
무위사 등을 답사하며 문화재 속에
배어있는 인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음에 감동을 느꼈다.
저자도 현장답사를
3~4회 이상 실시 한 다음 답사기로
옮겼다고 실토한다.
사실 우리는 이웃나라인 일본을 웃습게
여기고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다.
어디서 그런 뱃장이
나왔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일본에게 역사상
14C
임진왜란과,
근현대의 일제침탈
36년 2번의 크나큰 피해를 입으면서 그들에게
저항해왔다.
이는 저도 모르게 핏줄로 이어진 감정이
아닐까.
우리 민족은 일본에게 싸워서 지면 안
된다는 결의가 배어있다.
특히 지금은 덜 하지만 스포츠경기에서
지면 안 된다는 것이 철칙처럼 되어있어 출전 선수가 겁에 질려 싸워 보지도 않고 긴장부터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쟁심리가 은연중 이제 일본인에
대해 우습게 아는 심리로 자라 자만심을 키운 건 아닌지.
그러나 이런 경쟁심리가 일본의 높은
기술과 경제를 바짝 추격하는 요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일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쓸모없는 허장성세의 태도가 아닌가.
일본은 고우나 미우나 가장 가까운
이웃이 아닌가.
가장 가까이 있는 일본을 모르고 세계로
나가겠는가?
저자는 서문에서
‘일본인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현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라고 썼다.
탁견이다.
저자는 이런 콤플렉스의 색안경을
벗어던지자고 주장한다.
그래서 새로운 세대들을 위해서 이 책을
쓴다고 했다.
내가 소일의 중요한 일 중 세상과
소통하는수단으로 불러그를 중시 여기는데 그 중 세계여행을 다녀와서 올리는 풍정사진과 등산마니아로서 트랙킹 여정 중 일본의 명산과 이름난 곳을
자주 다녀와 소개하는 안나푸르나님의 안내는 상세하기가 등산,
트래킹 전문가들보다 더
세밀하다.
자주 대하는 일본의 기사 중 가장
부러운 것이 잘 정돈된 자연과 주변 환경이다.
마치 우리가 일본의 일상문화를 많이
따라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우선 답사기를 들여다
보자.
일본편 1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규슈로 주제가
‘빛은
한반도로부터’라는 2박3일의 여정이다.
2300년 전 벼농사를 갖고 규슈로 건너와
일본 열도에 야요이(彌生)시대를 개척해가는
도래인(渡來人)들을 증명할 박물관 토기를 위시한
유물들을 돌아본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 이곳에 끌려와
일본에 도자기 혁명을 일으키고 세계도자시장을 재패한 아리타야끼(有田燒)를 연 이삼평(李參平?~1655)
도조(陶祖),
사쓰마야끼(薩摩燒)를 이어가느
심당길(沈當吉)의 후손 심수관(沈壽官),
처음은 도공으로 출발했으나 일본의
성(姓)을 사 현달한
박평의(朴平意)
후손 박무덕(東鄕茂德,1882~1950)
등 우리 도공들과 그 후손들의 수고로운
자취를 살펴보았다.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한 백제유민들이
수성과 대야성을 쌓고 나당연합군을 대비한 자취도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규슈는
인재(人才)의 산실이었다.
가고시마는 이런 일본을 이끈 인재들을
현창(顯彰)하는 것이 참
부러웠다.
규슈의 가고시마를 중심으로
‘유신의 고향’이라 하여 1865년 15명의 젊은이들을 영국에 유학을 보내
선진문물을 배워 근대화의 역군이 된 인재들의 동상들,
유신의 삼걸의 한사람인 오쿠보
도시미치.
마지막 사무라이라고 칭송받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소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큐슈 출신으로 일본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의 숭배는 넘치는 민주화이 이름으로 개인숭배를 배척하는 우리나라 풍토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런 유적은 우리 후손들에게 선각자들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는 교육적 뜻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한반도로부터 끊임없는 문명의 빛을 받아
고대국가로 가는 기틀을 마련한 일본의 큐슈지방의 유적을 더듬으면서 지금도 끊임없이 진실을 왜곡하려는 일본 상층부의 어리석음을 보며 이제 기대할
곳은 일본의 양심있는 국민들이 아닌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가까워진 이웃 국민과 국민 사이
더 많은 교류가 이루어 져 왜곡의 벽을 깨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