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 -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 조선 문명의 힘 2
박철상 지음 / 너머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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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好樂齋 > 秋史와의 交感


박철상 선생의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을 읽고 

  80년대 초반 30대 초등학교 교사였던 나는 어릴 때부터 꿈꾸어 왔던 서예를 본격 배우기 시작했다. 한글서는 학교에서 필요하여 자주 쓸 기회가 있었으나 한문서는 처음 배우는 것이라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를 쓴 정주상 선생 서실에 인연이 닿아 배우고 있었다. 근무하는 위치가 마포에 있었기 때문에 5시에 퇴근을 하면 서실이 있는 종로2가의 견지동을 향한다. 그런데 광화문에서 버스를 내린다. 세종문화회관 지하전시실에서는 매일 크고 작은 전시회가 열리기 때문에 여러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시장에 들르지 않을 때는 책을 좋아해 교보문고에 들러 신간이나 고서의 영인본을 둘러보고 책장을 뒤적이는 것이 하루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서예는 글씨를 잘 써야 하겠지만 이론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시간 나는 대로 서점이나 문고에 들러 이것저것을 살펴보며 전문서에 관심을 가졌다. 것이다. 특히 역사부문에 관심이 많아 그 분야의 책을 훑어보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 지하 진열장 한적한 한쪽에 위치한 고서 영인본이 꽂혀있어 그곳에 주목하였다. 그곳은 아세아문화사에서 나온 책들이 대부분인데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고산(孤山), 송강(松江), 노계가사(蘆溪歌辭)’,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등이 내 서재에 꽂혀 있다. 그 책들은 그때 한 권 한 권 구입한 책들이다, 아직 한자를 한참 공부하던 시절이라 잘 이해는 되지 않았으나 틈나는 대로 꺼내어 이해의 폭을 넓이는 편이었다.

  인터넷의 서점을 검색하던 중 박철상 씨의 새로운  저작이 소개 되었다. 박철상씨는 최근 한문학계의 주목을 받는 분으로 전통학문의 자료인 한적을 많이 수장한 분으로 그것을 바탕으로 추사 김정희 활동에 주목하고 그에 관한 저작 세한도(歲寒圖)’를 내놓았다. 전통학문에 관심이 많고 추사 연구에 주목하는 나 또한 관련저작이 나오면 사 보는 편이다.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 다녔다는 책의 제목은 추사의 대련작품에서 뜻을 옮겨와 정한 듯하다. 특히 추사의 금석학활동에 주목하여 탐색한 내용이었다,

  필자는 추사 김정희 이전의 금석학활동 중 왕실 중심의 각첩을 제작하여 사용했는데 안평대군의 비해당집고첩을 시작으로 신용개의 해동명적이후 임진왜란 이후 이후원의 금석록과 조속의 금석 청완낭선군, 낭원군의 대동금석서김재로, 유척기의 금석록이 제작되었고 박지원은 삼한총서는 하나의 편집된 금석록이 있었다. 즉 고증보다는 탁본이나 자료를 모아 편집하여 감상적 측면이 강하였다. 김정희 금석학은 사신들의 연행으로 청나라 문사들과 교류가 늘어나자 탁본을 요구하고 한반도 금석에 관심을 갖는다. 김정희를 중심으로 금석학은 역사고증 및 서법고증에 괄목한 성과를 거둔다. 이 시기 학자들은 역사 고증과 서법 고증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학문으로 체계화 하였다고 보고 있다.

  유득공은 금석문을 단순히 서법의 전범이 아니라 본격적인 역사연구의 보조자료로 활용한다. 그의 저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시집이지만 발해고사군지는 역사책으로 금석문을 사료로 삼아 선학 연구가 있으므로 김정희의 금석학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1809년 연행을 통해 옹방강, 옹수곤 부자와 완원의 교유를 통해서 그들의 가르침은 김정희 금석학 성립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그 이후 1816~1817북한산진흥왕순수비를 답사 고증하고 경주답사를 계기로 금석문 발굴과 연구는 절정에 이른다. 특히 아들인 옹수곤은 적극적으로 조선의 탁본과 사료를 연구하였으나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동학 유희해의 해동금석원과 연계된 것은 다행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의 연구 성과는 청나라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청의 학자들이 조선의 금석문을 연구하는 기틀이 되었으며 조선의 문화에 관심을 갖게 했다. 또 추사의 연구 자료는 끼리끼리 공유되고 후학들은 오히려 중국의 자료에 의존하는 결과를 가져 와 아쉬움이 남는다.

  추사 김정희의 저작으로 알려진 예당금석과안록은 추사의 종합적인 금석학 연구 성과라기 보다 진흥왕 이비고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보이며 경필 필사본 형태로 전하여 일제 강점기 일본학자들의 복사본으로 보인다. 그 책에 수록된 내용은 추사의 저작이확실하다. 그중 해동비고목록을 보면 <평백제비>, <당유인원비>, <경주문무왕비>, <진주진감선사비>, <문경지증대사비>, <진경대사비>, <경주무장사비> 모두 7편이다. 이는 한국 금석문 연구사의 이정표가 되는 저작이라는데 있다.

  추사 김정희는 금석학을 학문으로 정립한 인물인 동시에 추사체를 창조한 서예가이다. 그의 서법에 관한 글은 편지 글 외엔 남기지 않았다. 저자는 추사체가 금석문을 연구하면서 탄생한 서체라는 논리를 편다. 중국의 스승 옹방강, 완원의 영향 그중 완원의 남북서파론북비남첩론에 이은 예유남북론의 영향으로 또는 한예(漢隷)’의 고증으로 그의 제자 조면호는 추사 예서는 당대의 비판에 적극 대응해 최고의 글씨임을 주장한다. 이는 금석학의 서법 고증으로 추사체가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책을 통해서 우리나라 금석학의 연원과 추사 선생의 서법 외적인 금석학 연구의 열정을 알았으며 아직 젊은 서예가를 중심으로 금석학을 연구하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뚜렷한 성과가 없음을 아쉬워하며 성과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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