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말리화 2 - 수화폐월, B愛 Novel
사쿠라 아카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역시 나의 취향에는 밋밋한 소설이 아닐 수 없다.

읽기 전부터 기대를 너무 했던 탓일까. 역시 언제나 기대란 적당히 해야한다.

하지만 가볍게 읽기는 나쁘지 않을 듯 싶다. 그리고 의외로 취향이 맞는 분들도 많은 듯 하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샤바케 - 에도시대 약재상연속살인사건 샤바케 1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밤을 꼴딱 샐 정도로 재미있게 읽기는 했는데, 특별히 할 말은 없다.-_-;;
요괴담에 추리물과 판타지가 얽힌 이야기인데, 사실 읽으면서 조금 의아하긴 했다.
그렇게 병약한 것 치고는 잘 돌아다니는 주인공과 무시무시한 요괴들이라면서 범인에게 너무 쉽게 당해버리는 이누가미와 하쿠타쿠도 그렇고^^; 더불어 뒤에 밝혀지는 주인공의 정체를 보고는 뜨악했다.
뭐 그럼에도 이 소설에 나오는 요괴들은 무척 귀엽더라. 주인공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위해 아우성치는 야나리들도 그랬고, 초반에 나타나는 방울아가씨나 병풍요괴도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을 아무렇게나 죽이는 그놈은 무섭더군.
조금 삐걱거리는 느낌은 있지만 가볍게 들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소설인듯.
뒷 편이 있다는데 보고 싶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보편적으로 문학이 주는 감동은 독자로 하여금 "그래, 맞아. 이건 내 얘기야." 라고 동감하게 만드는 데 있다. 하지만 가끔은 독자가 전혀 알지 못했던 얘기들을 만나면서 느끼게 되는 '낯선 생경함'에서 문학의 힘을 새삼스레 느낄 때가 있다. 특히 우리에게 그다지 익숙지 않은 나라의 낯선 문학을 접했을 때, 가끔 가슴을 쓸고 내려가는 서늘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내겐 북구의 낯선 나라, 헝가리의 작가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 『열정』(솔, 2001)이 그랬다.

이 책은 헝가리의 대문호로 일컬어지는 산도르 마라이의 1942년 작품이다.
190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이었던 소도시 가샤우에서 태어난 산도르 마라이는 어려서부터 독일, 프랑스 등 오랜 타국 생활 끝에 부다페스트로 돌아와 시와 소설 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헝가리의 영향력 있는 작가가 된다.
그러나 제 2차대전 후 공산주의 체제가 된 헝가리에서 자유에 대한 위협을 느낀 마라이는 1948년 조국을 떠난다. 이후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 등 여러 곳을 떠돌며 망명 생활을 하게 된 그는 긴 망명 생활 후 1989년 2월, 89세의 나이로 망명지였던 캘리포니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여기까지지만 소설가로서 그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랜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마라이의 작품들은 헝가리에서 출판 금지되었으며, 산드로 마라이의 이름은 세상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잊혀졌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난 후인 90년대에 정치적 대전환을 겪은 유럽에서 뒤늦게 1998년, 바로 이 소설 『열정』이 이탈리아에서 발행되면서 산도르 마라이의 운명은 크게 뒤바뀌게 된다. 『열정』은 이탈리아에서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독일에서도 발간되어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소설로 인해 잊혀졌던 작가 산도르 마라이는 '위대한 유럽 작가', '헝가리의 대문호'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부활했고, 그의 주옥같은 다른 작품들도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소설 『열정』은 과연 무슨 내용일까? 소설 밖의 드라마틱한 부활의 사연과는 달리 소설은 의외로 짧고 간단하다.
어려서부터 24년간 거의 형제처럼 지냈던 두 친구가 헤어진 후 사십일 년만에 만나 하룻밤 동안 재회한다는 것이 줄거리의 전부이다. 그것도 아무 사건 없이 두 사람간의 대화, 그것도 대화라기보다는 거의 한 사람의 독백만으로 소설이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시시하기만 한 줄거리의 소설에 대체 무슨 힘이 있는 것일까?

소설의 배경은 눈 덮인 북구의 웅장하고 쓸쓸한 성이다.
주인공인 헨릭 장군은 옛 친구 콘라드가 그를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는다.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가 버린 친구를 무려 사십일 년간이나 기다려 왔다. 아니, 사실 그가 기다린 것은 그의 친구가 아니라 과거 속에 숨겨진 진실이었다.
어려서부터 친형제처럼 지냈던 친구 콘라드는 사십일 년 전 어느 아침 사냥길에서 헨릭 몰래 그에게 총을 겨눈다. 그는 친구 헨릭의 아름다운 부인과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콘라드는 망설임 끝에 그를 죽이지 못한 채 총을 내려놓고, 그날 오후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그가 갑자기 떠남으로써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헨릭은 그날 이후로 팔 년 후에 부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부인과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지내고 그 후에도 수십 년간 성에 숨어서 은둔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렇게 떠나가서 동남아 열대를 떠돌던 친구 콘라드가 사십일 년이 지나서야 돌아온 것이다.

이제 다시 만난 그들은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
콘라드가 마침내 그를 찾아오리라고 확신했던 것처럼 그때와 똑같이 자리를 장식하고 그때와 똑같은 음식을 차려놓고는, 사십일 년 동안 준비해온 원고을 읽듯이 헨릭은 밤새도록 그들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콘라드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하게 듣고만 있다. 소설은 노인의 쉰 목소리가 과거를 생생하고 장중한 어조로 회상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 미스테리 구조처럼 진행되면서 사십일 년 전에 벌어진 일말의 진실을 향해 한발씩 나아간다.
콘라드는 정말 친구 헨릭을 쏘려고 했을까? 콘라드와 헨릭의 부인 크리스티나는 정말 사랑에 빠진 불륜 관계였을까? 죽기 전까지 크리스티나가 사랑한 건 둘 중에 누구였을까? 크리스티나가 콘라드에 대해 남겼다는 '비겁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크리스티나가 남긴 일기장에 담긴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콘라드는 왜 사랑을 포기하고 열대로 도망치듯 떠났을까?
헨릭이 사십일 년간 궁금해했던 비밀을 향해 소설은 천천히 목을 죄듯이 결말을 향해 다가가고 우리 모두는 헨릭과 함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콘라드의 마지막 대답을 기다린다.

그런데, 콘라드는 결국 아무런 대답 없이 떠난다.
그리고 헨릭 또한 말없이 그를 배웅할 뿐이다.
물론 우리는 헨릭의 장광설을 통해서 이미 그날의 상황을 알고 있고, 읽는 사람 나름대로의 해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소설의 공식에 따라 미스테리가 술술 풀려서 말끔하게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소설의 일반적인 결말을 기대한다. 그런데 정말 소설은 맨 마지막까지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든 의문의 해답을 분명히 제시해 줄 증거인 크리스티나의 일기장까지 - 헨릭은 그녀가 죽은 후 발견된 이 일기장을 그 후로도 수십 년 간 읽지 않은 채 기다려왔다. 정말 무서운 인간이다. - 두 사람은 하나도 펼쳐 보지 않고 고스란히 벽난로 속으로 던져 버린다.

누군가는 이런 결말에 대해 '이게 무슨 소설이냐.'면서 화를 버럭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한 채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에 도달하고 나서야 이 짧은 소설은 불이 꺼졌다고 생각했던 검불들 사이에서 새로 불길이 확 하고 일듯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아무 대답도 제시하지 않고 끝내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준비하고 있었던 의외의 반전이었던 셈이다. 그 반전이 전하는 의미란 소설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늘 그렇듯이 이미 질문 속에 대답이 들어 있다는 노인의 오래된 지혜 같은 것이다. 마지막 지점에서야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섣불리 지나쳤던 구절들의 의미를 처음부터 하나씩 되뇌어봐야 하는 셈이다. 여러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은 헨릭이 아니라 바로 독자인 우리들 자신이다.

소설이 수기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수기는 모든 걸 까발리지만 소설은 감추고 숨기고 싶어한다. 아니, 소설은 그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수기는 밝혀진 사실을 추구하지만 소설은 숨겨진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헨릭은 진실을 원하지만 진실이란 사실을 밝힌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점을 헨릭 자신은 이미 알고 있다. 이미 사십일 년 동안이나 진실을 모른 채 살아왔는데, 칠십이 넘은 노인이 된 이제 와서 사십일 년 전의 사실을 뒤늦게 밝혀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헨릭 스스로 말하듯이 어떤 질문들에 대해서 우리는 삶으로서, 생애로서만 대답할 뿐이다.

결국 소설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세 사람을 꽁꽁 휘감고 있는 '운명'이다. 운명이란 우연히 닥치는 불행이 아니라, 가늠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여러 관계들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결국 운명이란 풀거나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아들일 뿐이란 얘기다.
그래서 소설은 오히려 소설 속 운명보다는 우리가 읽지 못한 그들의 생, 소설 밖의 생에 주목하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절친했던 친구와 목숨만큼 사랑했던 여인에게 배신당하고 외딴 성에 박혀 살아온 노장군, 사랑했던 남자(혹은 남자들)와 헤어지고(혹은 말하지 않고) 여생을 침묵 속에 홀로 살아가야 하던 여인, 친구와 여자를 버리고 열대의 밀림을 떠돌아야 했던 한 남자.
소설은 그들의 절박한 운명과 함께 뼈를 깎듯 그들을 찾아왔던 고독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라는 숨겨진 질문을 던진다. 정작 중요한 건 사십일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삶과 죽음, 아니 전 생애로 대답하고 밝혀내야만 하는 운명의 진실에 대한 것이다.

또한 소설이 얘기하는 것은 엇갈린 운명만큼이나 다르게 살아가게 되어 있는 인간형의 대립이다. 헨릭 장군과 그의 아버지, 크리스티나와 콘라드 양쪽으로 서로 대립되는 쌍은 단순히 부와 가난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비유적으로 음악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대별되는 두 쌍의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삶의 취향과 리듬, 상이한 영혼을 타고난 대립항이다. 현실과 예술의 대립으로 간단히 얘기할 수 있는,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만남이 빚어내는 삶의 불가해성(不可解性), 떠도는 섬처럼 서로를 고독하게 만드는 엇갈린 비운(悲運)은 소설을 읽고 난 우리를 한없이 쓸쓸하게 만든다.

사십일 년간 고독을 씹으면서 친구를 기다려온 주인공 헨릭 장군이 처음에는 소름 끼치도록 무시무시하고 정떨어지지만, 결국 아무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친구를 순순히 배웅하고 나서 오랫동안 떼 놓았던 죽은 아내의 초상을 다시 걸면서 자신과 함께 일생을 보낸 늙은 유모에게 입을 맞추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몹시 사납게 굴던 어떤 높은 사람이 코를 푸는 모습을 보고 담박에 좋아졌다는 어느 소설의 이야기처럼 난 그제야 쓸쓸한 노장군이 담박에 좋아졌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이란 결국 불가해한 운명을 안고 초라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물론 우린 그렇게 태어난 나약한 존재일 뿐이지만 산드로 마라이는 마지막에 우리가 안고 의미를 부여한 채 살아가야 할 작은 해답 하나를 숨겨놓았다.
누군가는 죽거나 혹은 살아남음으로 서로를 배반한다는 건 사실이다. 영리함과 오만, 자만심으로 얻고자 애쓰는 중요한 삶의 이유도 있겠고, 영광과 비참, 전쟁과 평화, 다툼과 화해도 있다.
하지만 결국에 우리 삶에서 의미 있는 건 무엇이고 결국 애써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때 우리 마음속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산드로 마라이는 그 해답이 삶에 대한 열정이라고 얘기한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이것이 질문일세. 아니면 선하든 악하든 신비스러운 어느 한 사람만을 향해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정열적일 수 있을까? 우리를 상대방에 결합시는 정열의 강도는 그 사람의 특성이나 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할 수 있다면 대답해 주게."
그는 소리 높여 말한다. 마치 대답을 재촉하는 듯이 들린다.
" 왜 나에게 묻나?"
상대방은 조용히 말한다.
"그렇다는 것을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산도르 마라이,『열정』(솔, 2001) 중에서



우연이겠지만, 산도르 마라이가 헝가리를 떠나 쓸쓸히 해외를 떠돌며 망명했던 세월도 공교롭게도 사십일 년이었다.
결국 소설 속 헨릭 장군이 기다려온 세월만큼 떠돌게 된 것이 그에게 주어진 또 다른 운명이었을까? 그 세월 동안 그를 지탱하고 버티게 해준 건 과연 무엇에 대한 열정이었을까?

 출처는 http://blog.naver.com/book_bug/400032109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20% COOOL
야마다 에이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4년 12월
평점 :
절판


오감으로 확인하는 사랑의 형태

한 남자를 사랑하면 단편 소설을 쓸 수 있다. 이 법칙을 나는 최근에 깨달았다. 소설을 쓰고 싶어서 사랑을 하는 것인지, 사랑을 하고 있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녀 관계는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결한 요소이다. 슬프고 즐겁기도 하며 그리고 달콤하다. 이런 감정들은 구체적으로 생활을 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사치이다. 나는 마음의 사치를 알고 있는 남자와 여자가 정말 좋다.
―「소울 뮤직 러버스 온리」의 후기에서

현재 일본의 문학계에서 남성 작가의 선두 주자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라면 거기에 맞설 만한 여성 작가는 야마다 에이미(山田詠美, 1959년생)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그녀는 발표하는 소설마다 반드시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연애 소설의 여왕과 같은 존재이다. 데뷔작이 '아쿠다가와 상(芥川賞)' 후보작이 되었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987년에 제97회 '나오키 상(直木賞)을 수상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순문학과 대중 문학이라는 두 요소를 만족시키는 매력적인 소설을 계속해서 세상에 내놓고 있다.
최근에는 신인 문학상의 선고 위원을 맡기도 하는 등 문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난숙한 향기를 더해 가고 있으면서도 그 바탕에 있는 예민한 감각은 결코 시드는 법이 없다.

어느 때 거리에서 스쳐 지나간 남자의 웃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는 옛날 남자가 생각나 길 한가운데에서 울고 싶어진다. 어느 때 바에서 흐르는 흑인 음악은 한 남자를 떠올려 주며 나를 울린다. 후각이 있어서 다행이다. 청각이 있어서 다행이다. 오감이 정상이어서 다행이라고 신께 감사하는 것은 바로 이런 때이다.
―「소울 뮤직 러버스 온리」의 후기에서

일본 문학에서 연애라고 하면 예전에는 주인공의 이성에 대항해 고뇌하는 존재로서, 또한 최근에는 봉건적인 모럴에 반항하는 자포자기 속에서 육욕에 ?楮?존재로서 다루어지는 경우가 적잖았다. 여하튼 연애와 그에 따르는 쾌락은 감미로운 가책과 함께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리고 욕망에 대해서는 어딘가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혹은 폭발의 수단으로 받아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야마다 에이미가 그려 내는 연애 이야기는, 쾌락을 죄악으로 느끼는 일본의 풍토에 정면으로 맞서 쾌락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기분 좋은 취기를 띤 언어로 누에가 실을 자아내듯 정성 들여 풀어 내고 있다. 거기에서는 인생에서의 의미도, 사회에서의 의미도 따져 묻지 않는다. 연애는 다만 연애로서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즐거운 것으로서 인정되고 있다. '맛있는 것을 왜 실컷 먹으면 안 된다는 거지?' 하고 반문하듯이. 이것은 문학에서 연애에 대한 가치 전환으로도 생각된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고, 도중에서 끊어진 그 한숨들을 짜맞추면 내 이름이 되는 것이었다. 내리깐 긴 속눈썹. 커튼의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저녁 햇살은, 반쯤 열린 그녀의 입술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젖은 이에 부딪혀 나에게 입술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엉겁결에 입을 맞춘 그녀의 입술에서는 따스한 이 냄새가 감돌았다. 그것은 오래 전 여동생에게 뺨을 비볐을 때 맡았던 햇볕과 같은 냄새를 떠올려 주었다.
―「소울 뮤직 러버스 온리」에서

이런 애정 표현이 결코 외설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녀가 뛰어나고 민감한 육체 감각과 세련된 언어 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에게 시선을 보내는 장면에서조차 결코 교태를 부리지 않는다. 소설 속의 상대에게도 독자에게도. 때때로 영어 슬랭이 섞여 있긴 하지만 야마다 에이미의 언어 세계를 침범하지는 못한다. 그녀에는 무의식적인 기품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예감」이라는 에세이의 한 부분인데, 여기에는 그녀의 예민한 오감과 세련된 감각이 응축되어 있는 듯하다.

그 향수 냄새를 전에도 맡았던 적이 있다고 남자가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여자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지만, 두 시간 후에 이 향기가 어떻게 증발할지를 아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고 속삭인다.
그녀의 민감한 감수성은 작중 인물들을 내면으로부터 그려 낸다. 그것도 사고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육체 감각으로 인간이 그려진다고나 할까. 그런 고독한 개인과 개인이 애정에 의해 만나고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인간 관계가 성립된다. 일반적으로는 사회에서의 지위나 가족 속의 역할과 같은 꼬리표를 단 사람들이 만나 인간 관계를 맺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야마다 에이미가 제시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그렇지가 않다. 꼬리표들을 무시하고 남녀가 피부를 맞대는 데에서 인간 관계가 생겨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이름도 모른 채 섹스를 하고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데뷔작 「베드 타임스 아이스」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스푼은 아주 능숙하게 나를 귀여워한다. 단 귀여워하는 것은 나의 몸이지 결코 마음은 아니다. 나는 스푼에게 안길 수는 있지만 안아 줄 수는 없다. 몇 번이나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 틈을 메우고 있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베드 타임스 아이스」에서

이 이야기는 클럽 가수인 일본인 소녀 기무와 흑인 탈주병 스푼과의 필사적인 사랑에 마리아 언니와의 기묘한 삼각 관계까지 뒤얽히면서 전개된다. 예리한 감수성으로 묘사되고 있는 이 소설은 남자가 일본 경찰에 연행됨으로써 두 사람의 사랑은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두 사람은 헤어질 때 이런 말을 나눈다.

내 마음에는 이미 공식이 만들어져 있다.
2sweet+2be=forgotten.
(Too sweet to be forgotten.)
"잊기에는 너무 달콤해."
"계산에는 서툴러."
―「베드 타임스 아이스」에서


일본어를 아름답게 구사하는 흑인 여자

< 베드 타임스 아이스 > 는 발표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주옥 같은 작품으로 읽히고 있다. 그러나 야마다 에이미가 이 작품을 발표했던 당시에는 자칭 모럴리스트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흑인 차별파로부터는 흑인과 일본인의 연애는 불순한 교제라며, 또 흑인 옹호파로부터는 흑인의 육체를 찬미한다는 것은 흑인에 대한 역차별이라며 말이다.
그녀의 작품은 정조 관념이라거나 도덕이라는 범주를 초월하여 살아 있는 몸뚱이를 가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진지하게 응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난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스트리트 패션이나 힙합 음악 등이 크게 유행하며 흑인 문화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지금과는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제2차세계대전에 패배하여 어쩔 수 없이 미군의 주둔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일본인은 외국인에 대해 반쯤은 질투의 감정을 품고 반쯤은 동경을 품어 왔다. 「베드 타임스 아이스」발표 당시에도 그런 감정은 여전했으나, 그 질투와 동경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백인 중심의 와스프(wasp) 문화였다.
외국 문화라고 하면 서구의 백인 문화 일변도였던 것이 1980년대 후반부터 엔고가 계속되고 인간·물자·정보의 국제화가 이루어지면서 미국 흑인 문화로 확산되어 갔다. 어슴푸레한 어둠 가운데 미열을 띠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멋있는 공기. 그 발신지는 한국의 이태원에 해당하는 지역인 미군 기지의 주변이다.

내 아파트의 창 아래는 요코타(橫田) 기지의 게이트이다. 경비원은 언제나 내게 필리핀 사람이냐고 묻는다. BULL SHIT!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마음은 항상 흑인 여자이지. 일본어를 훌륭하게 지껄일 줄 아는 흑인 여자는 이 세상에서 나 한 사람뿐이다.
―「소울 뮤직 러버스 온리」의 후기에서

어쩌면 그녀가 흑인의 매력을 정면으로 내세우지 않고 소설 세계에 녹아 들게 함으로써 일본 젊은이의 흑인에 대한 인상이 변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굳이 스포츠 선수나 가수를 열거하지 않더라도 육체적으로 가장 뛰어난 인종으로서, 또는 표현력이 풍부한 사람들로서 말이다.

나는 말을 잘하는 녀석을 싫어한다. 마음속에 움튼 말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부족한 만큼은 몸으로 메우는 남자가 좋다. 몸으로 이야기할 줄 아는 남자는 멋지다.
―「AMY SAYS」에서

언젠가 흑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백인종이나 황인종이 우리를 이질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눈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이해를 구해야 한다. 결코 경박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남편이 흑인 남성인 야마다 에이미는 일본과 미국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맨몸에 상처를 받을 때도 더러 있다. 예를 들어 호텔에서 밤에 엘리베이터라도 탈라치면 대낮의 사무실에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면 백인에게서 이상한 눈길을 받는다고 한다. 평화롭고 우호적인 사람들임을 짐짓 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같은 연기를 하게 하는 그 사람들의 멍청함을 나는 영원히 미워하리라고 생각한다.
―「AMY SAYS」에서

평화롭고 우호적인 사람들임을 짐짓 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같은 연기를 하게 하는 그 사람들의 멍청함을 나는 영원히 미워하리라고 생각한다.
―「AMY SAYS」에서

현재는 시대의 흐름이 오히려 그녀의 뒤를 좇아온 듯한 느낌이 들지만, 그녀가 데뷔했을 때만 해도 흑인 문화는 서브컬처였으며 흑인 역시 아웃사이더로 간주되곤 했다. 그러나 야마다 에이미는 결코 그들을 이방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의식한다는 것은 이미 인사이더 측의 틀에 얽매여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인종 차별 반대를 호소하는 시점에서 보면 역차별이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역설이 존재한다.

나는 아프로아메리칸 대 일본인의 구도를 그리려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주인공과 그 연인에게는 이름이 있다. 각각 다른 이름을 갖고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고 다른 의식을 가진 한 쌍의 남녀의 연애를 쓰고 싶었을 뿐이다.
―「AMY SAYS」에서

그녀는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다. 매력적이라고 느낀 사람들의 대부분이 우연히 흑인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특히 지위나 직책, 학력 등의 꼬리표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일을 매우 혐오하는 것 같다.
사회나 가족 같은 인간 관계의 호칭조차도 초월한 궁극적인 개인과 개인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오키 상' 수상작인 「소울 뮤직 러버스 온리」라는 단편집에는 다양한 연애의 형태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테면 기혼 여성과 소년, 연인을 잃은 여성과 연인의 친구 같은 식으로 인물 설정이 되어 있으나, 상대가 결혼을 했기 때문에 혹은 친구의 연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성으로 인간이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소울 뮤직 러버스 온리」에는 미래의 계모와 아들이 그려진 단편이 있는데, 이 같은 설정에서조차 아들은 자신이 사랑한 여성이 아버지의 연인이어서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녀를 가두어 둘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모럴과 갈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의 몸과의 관계만 있을 뿐이다. 자신과 관계 있었던 남자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의 남자가 성(姓)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구절을 보면 야마다 에이미는 심지어 이름마저 꼬리표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흐름이나 사회의 변화, 인간 관계와 같은 외부의 틀에서가 아니라 육체와 육체로 만나는 맨살과 맨살이 맞닿는 감각으로 표현한다. 야마다 에이미, 그녀의 작품은 인간을 표현한다는 소설의 기본에 대해 가장 정직한 것일지도 모른다.

연애가 소설로 여물기까지

국적도 언어도 다른 남녀가 맨몸의 인간으로서 마주했을 때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실재하는 상대의 피부 감각이다. 혹은 그 육체의 실감으로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영어 식으로 떠들어대는 대화는 어디까지나 양념에 불과할 뿐 농밀한 크림 상태로 흐르는 것은 살아 있는 감정이다. 서로 닿는 것은 초콜릿색 육체. 그녀의 연애 소설 속에서는 매우 밀도 높은 생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펼쳐지고 있다. 예를 들어 여류 화가와 그 집에 굴러 들어온 청년 윌리 로이와의 이런 장면이 그렇다.

그는 그때의 일을 아주 꼼꼼하게 기억하고 있어 나를 놀라게 했다. 내 실크 랩 스커트가 어떤 식으로 바람에 날리고 있었는지, 내 빨간 립스틱이 어떻게 진과 어울리고 있었는지, 내가 라임을 짜는 손가락이 어떻게 자신의 욕정을 불러일으켰는지 하는 것 등을.
우리는 서로 안은 채 바닥을 구르고 팔레트의 그림 도구를 온몸으로 칠하면서 그래도 조금도 허둥대는 일 없이 서로 사랑했다. …… 바닥에는 반드시 우리의 몸으로 그린 그림이 생겼다. 그것은 어쩌면 캔버스에 그려진 그것보다도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윌리 로이는 나를 지금 매우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소울 뮤직 러버스 온리」에서

연애 지상주의 세계에서는 직책이나 돈이 통하지 않는다. 맨몸뚱이의 인간으로서 자신이 지닌 매력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조차 대단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사실 인용 부분의 여류 화가도 다른 연인과 동거중으로 설정되어 있다.
많은 연애 소설들의 이야기가 상대와 의사 소통마저 뜻대로 안 되는 안타까움을 숨긴 채 이른바 '스침의 미학'으로 전개되지만, 야마다 에이미 작품의 경우에는 미국식 프리 섹스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 어느 때 자신보다도 매력적인 인간??상대를 빼앗길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좋은 남자'가 '좋은 여자'를 빼앗는다. 아름다운 약육강식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는 아이다가 다른 남자를 방으로 불러도 결코 화내지 않았다. 화내지 않았다기보다 화를 내고 이성을 잃을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남자와 정사를 즐긴 뒤 그 남자를 배웅하기 위해 문을 열면 거기에는 메시지가 꽂혀 있었다.
'나와 즐길 때보다 목소리가 조금 작았던 것 같군.'
작은 종이 조각에는 그렇게 씌어 있었다. 그것을 본 남자들은 두 번 다시 그녀의 방을 찾지 않았다. SHIT라고 그녀는 혀를 차면서도 안락한 기분이 되어 나쁘지 않은데, 라고 중얼거렸다.
―「소울 뮤직 러버스 온리」에서

연애 소설의 매력은 두 가지로 들 수 있다. 하나는 독자 자신이 경험한 것과 같은 것을 보았을 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독자가 체험할 수 없는 세계를 소설을 통해 동경한다는 점이다. 야마다 에이미 작품의 경우, 흑인이 주인공이며 작품 무대가 대부분 미국인 점 때문에 독자는 공감보다 오히려 그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멋있는 세계의 공기에 매혹되는 것이다.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남자의 입술에 소스가 묻었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그 소스 맛있어?" 하며 그의 입술에 묻은 것을 팔을 뻗어 손가락에 찍은 다음 핥았다. 그러자 그 남자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입술에 묻은 소스는 입술째 맛보지 않으면 모르지.
그러고 나서 그는 테이블 너머로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첫 키스였다.

영화 같은 이 장면은 허구가 아니라 「Make me sick」라는 에세이집에 소개된 그녀의 실제 경험이다. 독자가 동경하는 소설 세계가 그녀의 주위에는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매력적인 남성들과의 연애는 설령 한때라 할지라도, 냉정함을 가장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밑바닥에는 억누를 길 없는 사랑이 넘쳐 흐르고 있다. 보잘것없는 사랑조차 하찮게 다루지 않는다.
그런 그녀 나름대로의 진심은 정사를 단순한 정사로서가 아니라 훌륭한 한 편의 연애 소설로 숙성시킨다. 이 글 앞에 소개했듯이, 한 남자를 사랑하면 단편 소설을 쓸 수 있으며 사랑이 계속되면 장편 소설을 쓸 수 있다고 한다.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은 머리 속으로만 생각하여 손끝으로 잔재주를 부려 완성해 낸 것이 아니다. 소중한 체험이 중심이 되고 추억의 피가 통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아픔이 고름으로 될 만큼 병들어 있기 때문에 좋은 작품으로 독자의 가슴에도 울리는 것이다.
연애의 대선배는 소설의 여기 저기에 사랑의 진리를 아로새겨 놓는다. 물론 어떤 지침서가 아니라 연애의 수만큼 사랑의 형태가 있음을 최대한 이해하고 나서 세련된 아포리즘을 제시해 준다.
"왜 나는 안 되지!?"라고 따지고 드는 소년을 부인은 조용하게 타이른다.

"남자의 몸을 요구하는 것은 처음 반년으로 족해. 그러고 난 후에는 마음을 원해."
"몸은 말이야, 과자와 같은 것이지. 마음은 빵과 같은 것이고, 베이비."
―「소울 뮤직 러버스 온리」에서

때로는 아픔을 동반하는 연애의 '쾌락'을 '상쾌한' 말로 그린다. 이 이중의 유쾌함에 의해 증폭된 작품은 마치 언어의 포도주처럼 독자의 영혼?沮?스며 들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연애'와 내가 미치도록 읽고 싶은 '연애 소설'을 늘 손에 넣을 수 있다. 나는 언제나 내 자신이 읽고 싶은 소설을 쓰고 있다.
―「AMY SAYS」에서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을 읽으면 사랑하고 싶어지는 것은 왜일까.

< 120% COOL이 되고 싶은 야마다 에이미 >

야마다 에이미의 팬인 나로서는 뉴욕 흑인여성의 입을 빌어 성과 사랑을 다룬《애니멀 로직》(유인경 옮김, 태동출판사)도 좋아하지만, 순정소설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차라리 같은 출판사의 《A2Z》가 그쪽에 가깝다. 이 소설을 두고 에쿠니 가오리를 연상하게 되는 독자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 나라에 출판된 그녀의 소설 가운데 《풍장의 교실》(박유하 옮김, 웅진출판), 《열대 안락의자》(김난주 옮김, 삼문), 《120% COOOL》(박정윤 옮김, 웅진출판) 등이 좀 더 문학적이며 그녀의 색깔이 진하게 배어있다고 볼 수 있다. 《열대 안락 의자》는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육감’에만 의지해 남자들의 속물근성을 물리치는 여자의 당당함이 재미있다. 남자들은 이 소설을 읽고 뺨을 맞은 듯 볼이 얼얼해지는 기분을 느끼리라. 그녀가 보기에 사랑도, 상처도 인간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생각하기’를 그만 둘 수 있는, 무언가에 지배받기를 원한다. 그녀는 몸으로 살아간다. 그녀가 용감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리다. 단편들을 엮은 《120% COOOL》은 몸을 다룬 순도 높은 순정소설이다.

“애니는? 넌 무엇의 지배를 받니?”
“나? 생각하기를 그만둬, 라는 소린가. 내 마음에는 꼬리지느러미가 없어, 고찰이 없는 거지.”
“그러니까 그렇게 솔직하게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거야. 너의 인생은 항상 묘사만으로 성립돼. 얼마나 멋있니. 예를 들자면 욕실에서 섹스한다. 그때 아래를 쳐다보면 바닥에 있는 타이드의 오렌지색 상자가 눈에 띈다. 아름답겠지. 그 상자에서 흘러나온 세제. 그것마저도 오르가슴이라는 사실에 취합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그러면 망상이 없으니까 결코 쾌락주의와는 결부되지 못해. 타이드와 오르가슴이 동등한 위치에 있으니까.”(《120% COOOL》, 203쪽)

 

출처는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1&dir_id=111402&docid=1937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것인가를 이 책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해야할 상황이 되었을때, 마치 짐승처럼 본능에 따라 움직일수밖에 없게 되었을때를 상상하면 소름이 끼친다. 아무것도 보이지않는 환한 우유의 바다에 빠져 그래도 살아남기위해 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 짐승처럼 아무곳에서 배설을 하며 비가 내려야 겨우 몸이라도 씻을수있다. 모두가 눈이 먼 나라에서는 수치라는 것도 더이상 찾을 수 없다. 그저 본능과 이기심에 뭉쳐 무리짓는 짐승들일뿐이다.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을때도, 책장을 열기 전까지도 (심지어 책의 제목이 눈먼 자들의 도시'임에도) 내용에 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한 남자가 차안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도중에 눈이 멀게되고, 그를 집으로 인도해주고 그의 차를 훔친 사람이 눈이 멀게 된다. 첫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안과의사도, 그의 환자들과 간호사도, 첫번째 눈먼 남자의 아내도, 그렇게 도시의 한사람 한사람이 전염병처럼 우유의 바다에 빠지게 된다. 정부는 눈먼 자들을 수용소에 가둬두기로 결정한다. 의사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과 함께하기 위해 눈이 멀었다는 거짓말을 한다. 의사와 의사의 아내, 첫번째로 눈이 먼 남자와 그의 아내, 자동차 도둑, 검은 안대를 한 여자, 사팔뜨기 소년, 검은 안대를 한 노인, 약국직원, 간호사 등등 이 소설에는 이름이 없다. 눈이 먼 사람들에게 더이상 이름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눈먼 작가가 말했듯이 나'라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나는 중간에 자동차 도둑이 다친 다리를 이끌고 군인들에게 호소하러 다가갔다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책을 덮었었다.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상상하며 나는 끔찍해졌다. 그리고 다시 책장을 넘기는 것이 조금 힘이 들었다.

눈먼 자들은 열악한 환경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으며 단지 식량을 제외한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다. 그들은 더이상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가 생각났다. 몇년전 서울에서 지낼때, 가끔 디비디방에서 심야정액으로 영화 세편을 내리 보곤 했었다. 꽤 열악하게 지내던 시절이라 그것은 문화생활의 오아시스같은 한 방편이었다. 그때 이 영화를 봤었다. 피아니스트가 아무도 없는 게토의 한 집, 독일장교의 앞에서 2년만에 피아노를 연주하던 장면은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인권이 철저히 무시됐던 그 끔찍한 상황을 기억하며, 길에 쓰러진 유태인의 다리위로 트럭을 몰고 지나가며 즐거워하던 군인들, 사람들에게 총을 쏘며 그 모습을 유희거리로 삼던 군인들을 떠올리며 나는 인간의 잔인함에 혀를 내둘렀다. 눈먼 자들은 점점 수가 증가했으며 수용소는 포화상태에 이른다. 그리고 이 작은 사회에서도 폭군은 나타난다. 무장한 깡패들은 식량을 점령하고 사람들에게 금품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주머니를 불리게되자 이제 여자들을 요구한다. 수용소의 여자들은 남자들을 먹여살리기위해 깡패들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리고 한 여자가 그 폭력앞에 죽게 된다. 의사의 아내는 깡패의 우두머리를 가위로 죽이고 사람들은 단합해 그들에게 저항한다. 그리고 수용소에 화재가 발생하고 그들은 건물밖으로 도망쳐나왔다. 이미 그들을 지키던 군인들도 없다.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의사의 아내와 그 주변사람들은 그녀의 도움으로 쉴 장소와 음식을 얻게 된다. 세상은 더이상 그들이 알던 곳이 아니다. 모두들 먹을 것을 찾아 한무리씩 이동을 했으며 길거리엔 오물과 역겨운 냄새들이 넘쳐났다. 죽은 사람들은 개들의 먹이가 됐다. 그들의 무리에 눈물을 핥아주는 개가 동참하게 된다. 의사의 집은 다행히도 사람의 침입에 안전했으며 그들은 그곳에 머물게 된다. 검은 안경을 쓴 여자는 검은 안대를 한 노인과 함께 하기로 약속한다.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시체들의 무덤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의사의 아내가 몸을 쉬러 들어선 성당에서 보게된 광경은 내게도 끔찍했다. 신은 눈먼 자들을 보지 않는 것인가. 모두가 눈먼 가운데 혼자만이 모든 참상을 보아야만했던 의사의 아내. 사람들은 그녀를 의지했으며 그녀는 그들에게 책임감을 느꼈다.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의 침대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는 안스러울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 눈을 찌르지않았던 것은 사람들에대한 책임감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눈이 멀기를 바랬으리라. 모두들 다시 시력을 찾게되고 의사의 아내는 외로움에 눈물을 흘린다. 우리가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보여준 모습때문일까. 그녀마저 눈이 멀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