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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새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이지수 옮김 / 디플롯 / 2026년 7월
평점 :
인간은 특별한 존재다. 이 말은 참일까 거짓일까.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는 이유로, 언어를 가졌다는 이유로, 문명을 만들고 지구를 지배해 왔다는 이유로 자신을 생명의 정점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인간은 언제나 다른 존재를 정의하는 기준이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중심이었다. 그러나 가와카미 히로미의 『큰 새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은 그 오래된 믿음을 인류의 가장 먼 미래에 놓아둔 채, 인간이라는 존재를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본다. 인류가 거의 자취를 감춘 세계에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멸망 이후의 세상을 상상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인간을 오래 응시한다. 종말을 이야기하는데도 절망보다 애정이 먼저 읽히는 이유는, 이 소설이 사라져 가는 문명보다 사라져 가는 존재를 끝까지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수천 년에 걸친 열네 편의 이야기는 서로 흩어진 조각처럼 시작된다. 시대도, 화자도, 문체도 조금씩 다르다. 공장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인간과 다른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며, ‘어머니’라 불리는 존재가 긴 시간을 건너 인류를 지켜본다. 처음에는 낯설고 기이한 풍경들이 이어질 뿐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각각의 이야기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서로를 비춘다. 연작이라는 형식이 만들어 내는 가장 큰 아름다움. 하나의 생애를 완성하는 시간의 구조. 조각난 세계는 흩어지는 대신 서로를 완성하고,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인류라는 긴 생애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멸망조차 하나의 서정으로 직조해 내는 이 작품의 힘은 바로 그 거대한 연결감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미래를 예견하는 SF라기보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무대로 인간이라는 종의 오래된 민담을 새롭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읽힌다.
인간다움은 이성이나 우월함보다 훨씬 사고한 곳에 남아 있는 듯하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경쟁심, 이유 없이 피어나는 질투, 누구에게도 완전히 닿지 못하는 외로움, 그럼에도 끝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 효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 때로는 인간을 가장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들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우리는 오랫동안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정의를 자랑해 왔지만, 이 소설은 생각보다 감정을 먼저 기억한다. 가장 연약한 부분이 가장 오래 남는다. 역설적이게도.
인류가 사라진 뒤에도 생명은 다른 모습으로 이어진다. 세계는 멈추지 않고, 인간이 비워 낸 자리는 또 다른 존재들이 살아간다. 그 긴 시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간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생명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중심에서 내려온 인간은 비로소 하나의 생명으로 선명해진다. 작품은 인간 중심주의를 무너뜨리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의 가치를 함께 지우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계의 중심에서 내려온 뒤에야 인간이라는 존재는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특별했던 이유는 가장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쉽게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가장 쉽게 외로웠고, 가장 쉽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큰 새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은 인류의 마지막을 상상하기 위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 바라보기 위해 수천 년의 시간을 돌아오는 소설이다. 기술과 진화, 멸망과 탄생이라는 거대한 상상은 결국 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우회로가 된다. 그래서 마지막 장에 이르면 마음속에 남는 것은 미래의 풍경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 지구 위를 살아가던 한 종이 끝내 품고 있었던 외로움과 사랑. 그리고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기억. 이 소설은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 인간을 기억하는 방식을 들려준다. 『큰 새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은 인류의 마지막을 그리면서도 끝내 생명의 지속을 믿고, 인간의 종말을 말하면서도 인간을 향한 다정함을 잃지 않는다. 인간은 가장 위대한 생명이어서 오래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야기하고 싶은 생명이기에 전해진다.
한 존재의 생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그 존재를 기억하고 이야기하려는 마음은 시간을 건너 새로운 형태로 이어진다. 『큰 새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은 인류의 마지막을 그리는 소설이면서도, 사라짐보다 이어짐을 바라보는 작품이다. 먼 미래의 풍경 속에서 인간을 낯선 거리로 바라보는 이 소설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다시 바라보고 싶은 독자, 기술과 진화 너머의 생명에 대해 사유하는 철학적 SF를 사랑하는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때로 하나의 이야기는 사건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오래 이어진다. 또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부드럽게 허무는 가와카미 히로미의 문학 세계를 좋아하는 사람, 조각난 이야기들이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생애로 완성되는 연작 소설의 매력을 찾는 사람에게도 특별한 작품이 될 것이다. 한 생명의 역사를 넘어 한 종의 기억을 따라가는 독서가 되어줄 작품이다.
✏️도서출판 디플롯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