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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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보스니아 내전 중이었던 1992년 5월27일 사라예보의 한 시장에서 빵을 사려고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박격포탄이 덮쳤다. 이 포격으로 단순히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섰던 22명이 죽었고, 최소 70명이 다쳤다. 이튿날부터 22일 동안,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는 그날 그 장소에서 죽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리며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연주했다.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의 애도 행동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스티븐 갤러웨이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를 썼다. 그러나 스티븐 갤러웨이는 베드란 스마일로비치가 이 책에 등장하는 첼리스트는 아니라고 했다.

 

1991년 보스니아는 유고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고연방공화국의 밀로셰비치의 도움으로 무장한 보스나이 내 세르비아계 강경 민족주의자들이 분리독립을 저지하겠다고 나서면서 주로 무슬림인 보스니악들에 대한 대대적인 인종청소를 단행했다. 이것이 1992년 4월 시작돼 1995년 12월에 종전된 보스니아 내전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상한 전쟁이 아닐 수 없다. 분리독립을 하기 위해서라면 유고연방과 전쟁을 할 일이지, 보스니아 안에서 자기들끼리 싸워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민족이란 것이 무엇이관대 한 나라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3여년에 걸쳐 지속했단 말인가. 그 속에서 죽이고 죽어야만 하는 '적'은 어떤 것이였던가.

 

이 소설에는 세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가족과 이웃의 심술맞은 독거노인이 사용할 물을 위해 사흘에 한번씩 죽음이 만연한 길을 왕복해야 하는 케난, 언덕 위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적을 증오해 저격수가 된 애로, 전쟁 초기 아내와 아들을 이탈리아로 보내고 외부세계와는 담을 쌓고 살면서 언젠가는 자신도 이탈리아로 도주할 꿈을 간직한 드라간. 이 세 주인공은 일상이 망가진 전쟁 중일지라도 인간이 버려서는 안되는 것들을 연주를 멈추지 않는 첼리스트를 통해 깨닫는다.

 

저들이 저 안전한 언덕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이 전쟁이 끝나길 바랄까? 뭔가를 맞히면 행복해 할까? 아니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 그들이 살기 위해 도망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로 충분할까? 집에 가서 자기 아이들을 보면 죄책감을 느낄까? 아니면 미래 세대를 위해 대단한 봉사를 했다고 생각하며 만족해 할까? -229쪽

도시는 언덕 위의 사람들로 부터 완전히 포위 당했다. 그들은 수시로 아무때고 박격포를 날리고 사격을 가해 사람들을 쓰러뜨린다. 물을 구하기 위해 먼길을 걸어야 하고, 빵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하며,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 때문에 길조차도 마음대로 걸을 수 없는 사라예보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점점 증오심을 키워간다. 적을 향하던 증오는 점차로 이웃에게로 그 반경을 넓혀간다. 그러나 케난은 심술맞은 이웃을 위한 물 기르기를 포기하지 않고, 애로는 무심한 살인기계로의 전향을 거부하며, 드라간은 자신만 살겠다는 이주를 포기하며 당당히 사라예보 거리를 활보하기로 한다. 그들은 떠밀려서 자신들 삶의 터전을 포기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빵을 사려고 줄을 섰던 케난은 22명이 죽어간 장소에서 첼리스트가 22일간 연주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첼리스트의 어이없는 행동은 그저 감상적인 짓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케난이 첼리스트의 연주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되자, 그는 첼리스트의 헝클어진 모습이 단정하게 제 모습을 찾고 도시가 스스로 회복되며 케난 자신은 가족들과 함께 하는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행복에 젖는 환상을 본다. 이 소설의 백미는 바로 이 부분이였다. 실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폭력이 일상이된 전쟁 속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모두가 제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즉 일상적인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을 때 삶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나 역시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깨닫음이 행동으로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때 사라예보에 있던 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두려움에 떨며 사라예보를 탈출할 기회만을 바라기가 쉽지 않았을까. 이웃에 의해 조금이라도 힘들어지는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기가 쉽지 않았을까? 증오에 찬 눈으로 내 몫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기가 쉽지 않았을까.

존 쿳시의 <추락>에서 루시가 강간과 폭행 속에서도 자신의 농장을 떠나려고 하지 않던 그 장면이 이해되었다. 자신의 터전에서 떠밀려나지는 않겠다는 삶에의 의지, 주체적 인간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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