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흑과 다의 환상 - 상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몰입도 95%
끊임없이 이야기가 열리는 그녀의 원더랜드에 초대받은 것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참으로 난해한 제목의 책. 더군다나 책 속에는 같은 제목을 가진 또 다른 책이 나오고, 그 안에서 책을 말하는 사람과 책을 찾는 사람, 책 속의 사람과 책과 현실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얽히고 설키며 겹겹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펼쳐 놓은 그녀가 책 속의 책의 첫번째 에피소드를 아예 장편 소설로 직접 독자들에게 선보인 것. 참으로 작가는 세계를 창조하는 크리에이터라는 걸 실감하게 한다.
'삼월은'에서 이미 등장 인물들이 소개한 이 책의 내용은 실제 소설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지만, 다시 펼쳐 본 바에 의하면 '사막 변두리에 있는 탑에서 수도사 세 명이 목을 매는 이야기, 가스미가세키에 있는 전봇대에 난쟁이의 손자국이 찍혀 있는 이야기, 축제가 한창인 밀실과 다름없는 광장에서 아이들이 단체로 사라지는 이야기'들은 적어도 내 기억에 의하면 실제 '흑과 다의 환상'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네 명의 주인공이 펼쳐내는 과거의 소소한 미스테리와 수수께끼들, 특히 각 인물의 결정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들은 이들이 여행하는 이국적이고 몽환적인 숲 속의 풍경과 더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세계에 푹 빠져들게 만든다.
부러운 것은 그런 수수께끼를 기억하는 주인공들의 남다른 기억력과 그것을 추리해 내는 비상한 추리력,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화제로 삼아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분위기. 그리고 복잡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몇 십년 동안 우정을 유지해왔고 앞으로도 유지해 나갈 주인공 네 명의 관계이다. 이들 네 명의 주인공은 마치 '삼월은'에서 주인공 고이치를 기다리던 회장과 그 친구들의 젊었을 적 모습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장을 소개하면서, 아직 한창 일하는 중년의 나이인 주인공들을 노인이라고 얘기한 건 아닐까.
역시 잘 쓴 글을 읽는 것은 마음 통하는 친구와의 대화나 여행처럼 즐거운 일이다. 주인공들이 10년 후의 여행을 기대하듯이 앞으로 떠나게 될 온다 리쿠가 펼쳐 놓은 세계로의 여행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