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의 추억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할머니인 적도 없지만 정감 넘치는 일러스트에 마음이 잔뜩 이끌렸다. 그림책의 주인공은 시골에서 고추 농사를 지으며 홀로 살아가는 순례 할머니다. 주인공 순례 씨의 일상을 그린 손바닥 그림들이 풀꽃처럼 여기저기서 피어나는 듯한 표지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순례 씨'는 채소 작가의 실제 두 할머니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딴 것이라고 한다. 순례 씨는 그래서 누구의 할머니도 아닌 우리 모두의 할머니다. 그분들의 지난했던 한 평생의 이야기다. 그림책은 특별한 서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순례 할머니의 어록처럼 보인다. -노니 뭐해. 일이 재미여. 오늘 딸 고추가 최고 쓸모니께.- 그림책의 텍스트들을 곰곰히 새겨 보니 그 안에 순례 씨의 인생 철학이 담겨 있다. 지금은 치매를 앓고 있는 시어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에게 하소연처럼 남긴 말씀이 생각났다. "통(通)해야 사는 기라." 내 인생의 잠언은 무엇일까?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나는 내 아이들에게 어떤 문장을 남길 수 있을까? 그림책이 시종일관 나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었다. -살아서 좋다던 것들도 가고 나면 다 먼지. 오늘 밤에 가도 아쉬울 거 하나 없다.- 나 또한 이런 마음으로 잘 살아가고 싶다. 일상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 소박함으로 나를 단단히 채우려 한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대지를 아름답게 수놓는 풀꽃처럼 말이다. -달달한 게 효녀고 가수들이 효자여.- 순례 씨는 지혜롭다. 버리는 법, 내려 놓는 법을 터득함으로써 어쩌면 외롭고, 노엽고, 슬플 수도 있는 황혼기를 거침없이 잘 걸어가고 있다. 연륜이 쌓인다고 해서 모두가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욕에 지배 당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목격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그림책과 함께 출판사에서 보내준 컬러링&필사노트는 앞으로도 요긴하게 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그림책 필사를 하면서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는 요즘이다. '그림책, 내 손끝에서 다시' 겸허한 마음으로 그림책 <순례 씨>의 전문을 필사해 보았다. 가장 매력적인 장면은 마지막 페이지다. 순례 씨의 당당하고 건강한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아서 따라 그려 보았다. 그림 제목은 《내 미래의 자화상》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할머니가 될 것이다. 채소 작가의 두 할머니처럼 잊혀지지 않는 좋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 고단했던 삶의 흔적들을 훈장처럼 달고다니며 유세를 떨지 않아도 괜찮다. 내 앞에 펼쳐진 하루 하루를 맑고 향기롭게 잘 살아내면 될 일이다. 순례 씨처럼...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보고 자유롭게 쓴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