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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것들의 도시 ㅣ 일인칭 4
마시밀리아노 프레자토 지음, 신효정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2년 1월
평점 :
몇 번을 읽었을까요!
그림책에 훅 빠져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림을 읽느라 글이 잘 안 보였습니다.
그림책이라기보다는 아주 고급진 미술관 도록 느낌을 받았어요. 너무나도 특별했답니다. 판타스틱한 장면 장면에 숨겨져 있던 섬세한 결이 어떤 파동을 타고 나에게 전해져 오는 듯 했어요.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이 짜릿해집니다. 매번 상상을 초월하는 장면들이 화면 가득 펼쳐지니까요.
두툼한 책 두께만큼 무게감도 상당합니다.
그림이 무려 55점입니다. 면지까지 합치면 더 되네요.
보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머릿속이 와글거려요.
잊혀진 것들의 도시가 있다?
이런 상상, 정말 매력적이지 않나요?
문득 이런 저런 공상으로 허기를 채우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어요.
-샤, 잊혀진 것들의 도시입니다.
그곳에는 우리에게 잊혀진 모든 것이 모여 있습니다-
헉!
저는 이 문장때문에 순간 아련했어요.
잊혀졌던 온갖 그리움들이 조각보처럼 펼쳐지는 듯 했으니까요.
수많은 관계 속에서 그래도 빛나는 하루를 살아내느라 숨이 가쁜 인생들.
아프고 고달파도 참아내며 너와 나의 사랑을 확인하는 애처로운 존재들.
매일 아침 태양이 떠오르면 지난 밤의 어둠을 잊고 또 다시 달려가야만 하는 우리들.
기필코 잊고 싶지 않았지만 기억 저 편으로 사라져 버린 소중했던 순간들.
그 모든 것들에게 말을 거는 마법같은 그림책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앞면지는 원작 느낌을 그대로 살려 두었군요.
작가 마시밀리아노 프레자토는 토리노 태생으로 2013년부터 이탈리아 출판사 '라비에리'에서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며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번 작품은 '신비로운 일러스트와 독특한 상상력이 빚어낸 환상동화'라는 평을 들으며 2021년에는 단편영화화 되어 이탈리아 다수 영화제 베스트 필름상 및 특별상을 수상하였다고 합니다.
영화가 살짝 궁금해지네요.
그렇다면 북트레일러로 그림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감상해보시는 것도 좋겠어요.
-모든 것은 한 소녀가 제게 건넨 한 마디 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샤(sha)로 가세요. 샤의 주인을 찾아 그를 도와주세요.-
수수께끼같은 그림책의 서문인데요. 그림책을 다 읽어봐도 저는 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녀는 누구이며 '저'는 누구인지...
그림책의 주인공은 화자인 '저'와 샤의 주인인 까마귀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달팽이와 잠시 다녀가는 몇 마리 고양이들, 눈물을 먹고사는 작은 유령들, 옷장 안에 숨어있는 두려움들, 버려진 알들, 잊혀진 장난감들, 잊혀진 사람들, 상처입은 행성, 추락한 이상(理想)과 같은 다소 충격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면서 대서사를 엮어냅니다.
-수많은 잊혀진 것 중에는 잡다한 물건이나 책, 고양이도 있었지만, 어딘가 이상하고 쉽게 사라져 버릴 것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말'입니다.
까마귀는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말들을 병에 담아 두었습니다.
가끔씩 병마개를 열고, 멀리 날아가는 말들을 보며 조용히 눈물 흘릴 수 있게 말입니다.-
여기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세상을 떠도는 수많은 말들이 누군가의 가슴에 담기어 눈물이 된다는 설정이 참 아름다웠어요.
한 번 쓰고 버릴 말이라도 함부로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되뇌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까마귀의 하루 일과를 따라가 볼게요.
동이 트면 잊혀질 수 모든 것들이 이곳에 도착합니다. 까마귀는 온갖 기억으로 뒤덮인 사막에서 매일 아침마다 선별 작업을 시작해요. 쓸모없는 것과 값진 것을요.
심연에서 꿈을 끌어올리는 일은 그가 애정을 쏟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거침없이 일을 수행하다가도 그를 멈추게 하는 사물이 딱 하나 있습니다.
거울인데요.
-까마귀는 거울을 발견할 때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거울에 비친 무언가를 바라봅니다.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그 무언가를...-
이 순간의 거울은 어떤 의미일까요?
스스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통로로서 거울을 차용한 것 아닐까요?
도시의 가장 깊은 곳에는 잊혀진 사람들이 있었어요.
까마귀는 거울을 어깨에 메고 우물 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잊혀진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거울을 가져다 주려고요.
저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어요.
다만 잊혀지고 싶지 않은 제 마음이 투사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일까요?
잊혀진 사람들이 우물밖으로 날아오르는 바로 이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어요.
가장 완벽한 작별을 고하며 눈꽃에 몸을 맡긴 채 장엄하게 사라지다!
그림책과 함께 그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요.
잠깐만요. 까마귀에게 아직 할 일이 더 남아있군요.
선별작업이 끝나고 나면 이제 돌봄의 시간입니다. 책의 모든 글자들을 깨끗이 닦아내고 햇볕에 말립니다. 편지는 바람에게 맡기고요. 작은 유령들에게는 눈물을 먹여주고, 버려진 알들에게는 이야기를 들려 주어요. 어둠이 내려앉으면 옷장 안의 '두려움들'을 꺼내줍니다. 함께 영화를 보고, 밤이 되면 새로 온 꿈들과도 인사를 나누어야 해요. 비로소 달이 바닷속으로 잠기면 그제서야 휴식이 찾아오지요.
정말 까마귀가 열일을 다하네요.
그런데 샤의 주인은 왜 까마귀일까요?
잘 잊어버리는 사람에게 까마귀 고기를 먹었냐는 말을 하는데요. 잊혀진 것들의 도시에서 그것들을 돌보는 주체가 까마귀라는 것이 역설적으로 다가오기도 했어요.
그림책을 읽으면서 또 마음 아팠던 것은 전쟁과 상처, 폭탄이라는 끔찍한 단어를 만나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한때 전쟁이 일어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을 되새기고 싶진 않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샤에 악취를 풍기는 거대한 알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알이 아니라 작은 행성이었습니다.-
환경 파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지구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해서 저는 솔직히 무서웠어요.
모든 것이 꿈이었을까요?
그림책 속 화자 '저'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도네요.
-저는 최선을 다해 관찰하고 배울 것입니다. 그리고 잊혀진 것들을 돌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나의 마음이기도, 우리 모두의 마음이기도 하니까요.
일상에 지친 나와 너를 위로하며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림책, <잊혀진 것들의 도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