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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사기 -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음 |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적으로 내 자신은 프랑스의 현대사유에 대하여 관심은 많지만 그에 대해 전부 동의하는것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합리적 보수주의를 자임하는 나로서는 프랑스 사유의 독창성과 참신함, 화려함에 마음이 끌리면서도 특히 후기구조주의에서 나타나는 지나친 상대주의(그것이 미적이건, 윤리적이건, 인식론 적이건)와 비합리주의에 동의할수 없기 때문이다.
몇년전 과학철학수업을 들으면서 과학사회학이라는 분야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쿤의 상대주의보다 더욱 과격한 블루어나 라투르의 이론을 접하고서 상당히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엔 푸코나 데리다가 본격적으로 소개될 때였고 그들의 사유중 내가 동의할수 없는 부분들(지나친 상대주의라는 느낌)이 많다는 생각을 하던 중 미국에서 소칼이란 사람이 장난을 쳤다는 글을 읽었다. 몇년후 이 책이 번역된 것을 발견하고 그날 즉시 구입하였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이 책을 읽었고 처음에 받은 느낌은 꽤 글이 재미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사실 그렇다. 소칼은 프랑스철학자들을 조롱하는데 소질이 있는듯하다. 단순히 잘못을 논증하는것을 넘어서 재치있는 문체로 조롱하고 있으며 이는 번역자의 실력이 뒷받침되어서 더욱 재미있다.
그런데 이 책은 문제가 심각하다. 많은 분들이 지적했듯 이 책은 처음부터 논리실증주의적인 입장에서 '논증되지 않은건 무의미한 헛소리다'라는 전제로 시작한다. 당연히 이런 입장에서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영미철학은 그 결과 굉장히 공허해진다-그들에게는 헛소리가 된다. 그런데 콰인이 지적한 논리실증주의의 모순을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검증이란것 자체가 모든걸 결정한다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웃긴가? 저자의 이런 입장은 구조주의에 대한 글중 '얄팍한 인문학적 지식에 과학의 합리성의 껍질을 씌우려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이란 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소칼은 자신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인문학 자체를 헛소리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논증 자체도 상당히 문제가 많다. 이정우선생의 비판을 참조할 것까지도 없다. 들뢰즈의 경우 몇페이지에 걸쳐 인용해 놓고 고작 '모두 헛소리다'라는 식으로 때운다. 이리가레이나 보드리야르의 경우 조목조목 짚어낸 것과 대조적이다. 라깡의 경우 틀린점이 생각보다 많지 않자 '연관성을 왜 설명 안하냐?'라는 식으로 트집을 잡는다. 물론 라깡의 경우 특히 현학적인 면이 강하긴 하지만 라깡의 이론을 공부하면 오히려 그의 수학적 모델의 설명의 필요성이 절실해지는 것을 느낄수 있다. 그의 이론체계의 3개의 계의 관계가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칼은 이런걸 알수 없을 것이다. 우선 이쪽에 관심이 없고 자기가 이해안된다면 헛소리로 볼테이니.
마지막으로 한가지 추가. 나는 미국의 PC운동가들이나 해체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상대주의에는 짜증이 난다(소칼의 책에 보니깐 미국의 프랑스사상 수용자들은 본토보다 더 극단으로 나간다는 식의 서술이 있는데 그건 맞는거 같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것은 미국식 상대주의의 원조라고 할 푸코와 데리다에는 아무 말이 없다. 물론 두사람이 과학적 은유를 잘 안썼을 테니깐 그런것 같은데 정말로 미국의 괴상한 상대주의를 비판하려면 사실 두사람에 대하여 언급하는게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되는 것이다.
이 책은 한번 볼만은 하다. 우선 이책을 보면 첫번째는 읽는데에 재미가 있고. 두번째 보면 미국식 사상의 폐해를 알수 있으며 어찌되었건 프랑스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깐.